가난한 집 평범한 고등학생에게 들려온 ‘복음’
저는 1954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논 여섯 마지기 소농의 첫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저에게는 운명적으로 나를 누르고 있는 세 가지 사슬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가난이요, 둘째는 머리가 뛰어난 수재가 아니요, 셋째는 힘이 약하다는 것이었습니다.저는 농부의 아들로 지게 지고 풀 베고 나무하면서 컸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나무 짐을 지고 산에서 내려오다, 너무 무거워 지게를 받쳐놓고 쉬었던 산모퉁이 길이 생각납니다. 또 풀을 베다가 큰 뱀이 나타나자 낫을 버려두고 “엄마”를 부르며 울면서 집으로 오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난한 경우 머리가 뛰어난 수재라면 희망이 있겠지만 저는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하루는 농사일을 하시다가 늦게 돌아오시는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제가 잠자고 있는 줄 알고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사투리였죠. “큰 애라고 태어났는데 별로 똑똑하지도 않고 공부도 특별히 잘하지도 못하는데다 병신같이 두들겨 맞거나 다니고 하니 저것을 어디다 쓸 수 있을까잉?”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자 아버지께서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아들에 대한 실망감을 나타내시며 “글쎄마시”라고 답하셨습니다.
저는 가난했고 공부도 뛰어난 편이 아닌데다 힘이 약해서 아이들에게 두들겨 맞으며 다녔습니다. 오른쪽 머리를 만지면 아직도 흉터 자국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 동네 형체와 하철이가 나를 벽에다가 밀어붙여 머리를 받치자 피가 터져 난 바로 그 상처 자국입니다. 또 공도 잘 차지 못해 축구팀을 나눌 때 제가 들어간 팀에 1점을 더 주고 시작했습니다. 제가 들어간 팀이 질 확률이 많았으니까요.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날마다 아버지를 도와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 컸습니다. 커가면서 저는 이 암울한 삶은 힘이 없어서라고 가슴 깊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힘을 쟁취하리라 하는 다짐을 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외가가 있는 벌교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광상 김씨 어머니 집안은 자랑할 만한 족보는 있었으나,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벌교 가난한 집 딸이 고흥 사는 가난한 집에 시집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가난한 외갓집에서 눈칫밥을 얻어먹으면서 나는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1년 반 동안 외갓집에서 얹혀 지내다 너무 미안하고 힘들어서 따로 나와서 벌교중학교 후문 뒤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연탄 갈고 빨래 하고 밥 지어 먹으면서 학교를 다닌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연탄불이 꺼지거나 김치가 떨어지면 굶는 것도 다반사였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김치가 떨어지고 연탄불도 꺼지고 쌀마저 얼마 남지 않아 김치와 쌀을 가지러 고흥에 가야 될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그 때는 3일간 중간고사였습니다. 나는 시간을 내어 김치와 쌀을 가지러 고흥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틀 반 동안 배고픔을 참으면서 버텼습니다. 그러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담을 넘어 옆집 땡감을 따 먹으면서 허기를 메웠습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자 할머니께서 김치를 가지고 자취방에 오셨습니다. 저는 너무 배가 고팠던지라 할머니 얼굴을 보자마자 치마를 붙잡고 그냥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렵사리 중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광주상고로 진학하게 됐습니다. 어떻게 광주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아버지께서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면 서기 시험에 합격해 집안 사정이 조금 나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1학년 시절에는 광주 대광교회 뒷집에서 동생들과 자취를 했습니다. 교회 가까이 사는 연고로 교회에 나가게 됐습니다. 교회 근처에 자리잡은 것은 저에게 축복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당시 최기채 담임목사님은 주일예배 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생활을 개선코자 바둥거렸던 저에게 소망을 주는 복음으로 비춰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저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학생 예배를 마치고 놀러나가지 않고 반드시 대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학생회 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학생 성가대 활동도 착실히 했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해 베이스를 맡았습니다. 베이스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해도 낮은 목소리로 우물쭈물 따라가면 그런데로 버틸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새벽기도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저의 영혼을 깨워 주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탈출구요 기폭제였습니다. 거의 날마다 나가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송하성 박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