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 1등, 대학에 두 번 떨어지다
고2 겨울은 제 인생을 바꾸는 겨울이었습니다. 정기오 목사님이 계시는 광주중앙교회에서 광주 시내 고등학교 학생 6백여명이 모이는 수양회가 있었습니다. 강사로 모신 대구 서문교회 이성헌 목사님은 외쳤습니다.“여러분은 이 시대의 요셉들입니다. 큰 꿈을 가지십시오. 찬란하고 영롱한 꿈을 꾸십시오. 여러분들 중에 골목가게 주인이 되고자하는 꿈을 가진 이가 있습니까? 그러면 골목점 빵 주인 밖에 못됩니다. 더 큰 꿈을 가지십시오!”
저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까지 제 꿈은 은행이나 농협에 취직해서 밥이나 먹고 사는 것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정도의 꿈을 가진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은 될 수 있어도 꿈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렸을 때부터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연상되면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탈출구는 공부를 잘 하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대학교를 가기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돈이 없고 가난하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고2 추석 때 아버지께 밤새워 제 꿈을 상의드렸더니 저의 진심을 이해하시고 진학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고자 하는 대학에 합격하면 첫 입학금은 대줄테니 그 이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밤을 새워 대입 준비를 했습니다. 고교 입학은 전교 40등의 성적으로 했지만 졸업은 진학하려는 학생들 중에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상업학교의 공부 한계와 실력 부족으로 인해 가고자 하는 대학의 입학시험에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대학 시험에 떨어져 서울에서 학원을 다니며 재수를 했습니다. 재수를 하더라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학비가 부담이 됐습니다. 그래서 후암동에서 셋방살이를 하는 이모집에다 짐만 놔두고 남영동 네거리에 있는 집현전 독서실에서 잠을 잤습니다. 의자를 몇 개 붙여 침대를 삼든지 아니면 라면박스 몇 개를 눌러 깔아 몸을 눕혔습니다. 제 몸을 감싸고 있는 시험에 떨어졌다는 패배주의를 생각하면 몸이 힘든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수송동에 있는 학원에 다니며 공부를 했습니다. 한 달 학원비가 만 오천원 이었는데 한 달에 이만원씩 아버지가 송금해 주셨습니다. 시골 상업학교를 나온 촌티 나는 재수생이 같은 반 서울 아이들과 친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첫 시험결과 영어는 76점으로 경기고 나온 이상중 군과 공동 1등을 했으나 상업학교에서 수업 수가 적었던 수학은 중, 상위정도에 머물렀습니다.
저는 독서실에서 용산고를 나온 재수생들과 친해졌습니다. 그러나 라면 한끼를 먹는 것도 돈을 생각해야 하는 처지에서 재수 생활은 암울하고 무기력했습니다. 가난했으나 순수하고 맑게 자라났던 소년에게 서울 생활은 혼돈과 피곤함을 더해 주었습니다.
주일이면 한경직 목사님과 박조준 목사님이 설교하는 영락교회에 나갔습니다. 그곳에 대학생들이 모이는 모임이 있었는데 재수생 입장에서 대학생들과 같이 어울리기 어려웠습니다. 어딜 가나 외톨이였고 손잡고 이끌어주는 사람 역시 한 명도 없었습니다. 광주에서 올라와 같이 재수하는 친한 친구 이강래, 송하진과 만나 서로 위로하다가 헤어지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학원 성적은 기본적인 실력은 갖추었기에 양호했습니다. 원하는 대학에 갈 만큼 좋은 성적이었습니다. 입시추위란 말이 실감날 만큼 추운 날, 다시 대학입시를 치뤘습니다. 중요한 문제 두어 개를 실수로 틀리는 등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떨어지기야 하겠느냐는 생각으로 합격자 발표 날짜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이었습니다.
송하성 박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