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가 패배주의의 나락에서 나를 구해냈다
패배주의에 젖어있어 그런지 2차 대학으로는 아르바이트도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해도 보수가 적었습니다. 1학년 겨울방학 두 달여 동안 체신부 9급 공무원으로 겨우 월급 2만 5천원을 받으며 일을 했습니다.그 후 동대문근처에 있는‘덕원각’이라는 중국집을 하는 사람의 홍제동 집에서 입주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중학교 2학년 학생을 한 달 가르치자 35등에서 20등으로 오르더니 다음 시험에서 무슨 이유인지 다시 40등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학생의 어머니는 저에게 입주 아르바이트를 그만 둘 것을 조심스레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일 모레면 나오는 이달 성적을 보고 짐을 옮기겠다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성적은 10등이었습니다. 저는 ‘불명예는 회복했다’는 생각에 짐을 싸고 다시 명륜동으로 돌아왔습니다.
명륜동 성대 캠퍼스 바깥에 성대 소유의 테니스장이 있었으며 테니스장 뒤에 군대 막사식으로 생긴 콘세트가 있었습니다. 이 콘세트는 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의 모임인‘근로 장학회’에서 관리하고 있었습니다.‘근로 장학회’라는 말은 얼핏 생각하기에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들에게 상을 주는 모임이라 느껴지지만 사실은 학비를 벌어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근로 장학회 서클에 가입하여 회원이 됐는데 마침 콘세트 방이 하나 비게 되어 사용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방세를 안 내는 공짜 방이지만 처음으로 제가 가져보는 전용 공간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1974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온기가 없는 방에서 침낭에 몸을 묻고 이불을 덮어도 이가 시리도록 추웠습니다. 하지만 내 전용 공간이 생겼다는 생각에 마음만은 따뜻했습니다.
후기 대학의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제게 ‘열심히 해도 잘 안되는 구나’, ‘내가 하는 것은 사사건건 잘 되는 일이 없다’는 패배주의는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얻으리라’는 말씀을 자기 중심적이고 현세 구복적인 얕은 믿음으로 해석한 것이 마침내 부작용을 드러내게 된 것이었습니다. ‘문을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는데 열리지 않는 것을 보니 다 거짓이 아닌가’ 하면서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의 낭만이라는 미명 아래 술 마시고 흡연하며 방탕한 대학생활을 보내게 됐습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로 시작되는 당시 유행하던 대중가요가 있었습니다. 바로 나의 심정을 대신해주는 듯 했습니다. 이러한 체념과 방황을 하느니 휴학을 하고 머리 깎고 군대로 도망이나 가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절망의 끝에 큰 변화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음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우연한 기회로 시작한 성경 공부는 다시 저를 붙잡아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요한 목사님을 만나 먼저 창세기를 공부했는데 창세기 말씀이 너무 좋았습니다. 여기서 배운 것 중 ‘사람은 부모의 성관계에 의하여 우연으로 생긴 존재가 아니고 목적이 있는 필연적인 존재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벌어먹고 살다가 죽는 생물학적인 무의미한 삶을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사명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저를 감동시켰으며 곧 제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송하성 박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