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고시 문제는 너무 어려웠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행정고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단번에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은 아니었습니다. 한번 떨어졌으나 그 정도는 ‘병가지상사’라고 생각하고 계속 준비했습니다. 당시 목사님께서 조언하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부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고시에 재도전하라”는 말씀은 저에게 큰 힘이 됐습니다.저는 1978년 제22회 행정고시에 다시 응시했습니다. 그런데 시험 문제가 너무 어렵게 나와, 오랜 기간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나 저같이 많이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나 큰 차이가 나지 않게 됐습니다. 사실 될 만한 수준의 고시 준비생의 공부량을 100이라 하면 저의 공부량은 45나 50 정도였습니다. 사흘째 보는 마지막 시험은 회계학이었는데 많이 준비하지 못한 취약 과목이었습니다. 저는 기도하고 점심을 거른 채 12시부터 2시까지 이정호 교수의 회계학 책을 읽어 나갔습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사진 찍듯이 보고 바로 넘겼습니다. 두 시간 동안 거의 300쪽의 책을 다 넘길 수 있었습니다. 시험문제를 보니 방금 보았던 책의 내용이 마치 사진현상을 하듯이 거의 떠올랐습니다. 마치 기적 같았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책 내용을 현상 인화하여 답안지를 메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시험을 치르고 돌아온 후부터 합격자 발표 날 아침까지 시험에 떨어져 머리 깎고 군대에 끌려가는 꿈이나 꾸고 있었습니다. 또 ‘연속극 꿈’으로 다음날에는 논산훈련소에서 두들겨 맞고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기는 동안 너무도 힘이 들었습니다. 합격자 발표 날에도 저는 자포자기하고 늦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제학과 1년 후배 박병학이가 제 하숙집으로 들어와서 “하성 형, 내가 중앙청 게시판에 가서 봤더니 형이 고시에 붙었던데 뭐하고 있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입고 있던 옷에 겉옷만 걸치고 정신없이 뛰어나가 205번 버스를 타고 중앙청 게시판에 가보았습니다. “수험번호 10344번 송하성” 제 이름이 있었습니다. 간신히 합격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광화문 앞 해태석상 뒤에서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지금까지 저의 가슴을 누르고 있던 운명주의와 패배주의의 사탄을 믿음으로 깨뜨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979년 5월 6일 박정희 대통령 명의의 행정사무관 임명장을 받고 1년 동안 수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식발령은 시험성적과 1년이라는 수습기간의 점수를 합산해 성적서열을 매긴 후 지망하는 부처에 따라 성적순으로 줄을 세워 잘라서 이루어집다. 수습 중 저는 우연히 제 성적을 알게 되었습니다. 합격자 250명중 241등 이었습니다. ‘실력 좋은 응시생들도 많이 떨어졌는데 어떻게 붙을 수 있었을까?’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 가지 이유였습니다. 하나는 시험문제가 너무 어렵게 나와 저같이 공부를 적게 한 사람이나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험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점입니다.
합격 후 저는 행정사무관으로 1979년 11월부터 경제기획원에서 수습을 했고 1980년 7월 경제기획원 기획관리관실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많은 부처들 중에서 경제기획원을 고집한 동기는 무엇보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가난한 고향 남도에 대한 연민의 정과 더불어 남도를 잘 살게 하는데 기여하려면 경제기획원에서 일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늘 잠재의식 속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저에게 입대영장이 날아왔습니다.
송하성 박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