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하성 병장, 십년 감수하다
그러던 어느 날, 상병에서 막 병장으로 진급했을 때의 일입니다. 주번하사 완장을 차고 중대장실에 있는데 신참 상병들 몇 사람이 들어오며 ‘일등병들이 군기가 빠져 있으니 오늘 저녁 훈련을 시켜야 되겠습니다.’라는 보고를 했습니다. 나는 기합을 주는 것은 좋은데 때리지는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큰 비명소리가 났습니다. 상병들이 기합이라는 명목하에 일등병들을 모두 세워놓고 부산대 다니다가 군에 온 신성식 일병을 집중적으로 구타한 것입니다. 때리고, 차고, M16 개머리판으로 짓이기기까지 했습니다. 급기야 기절까지 해 버렸습니다.이 보고를 받고 저는 무척 당황하고 겁이 났습니다. ‘만일 신 일병이 죽거나 불구가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를 포함하여 상병들은 모두 군대 감옥인 남한산성을 갈 것이다. 형을 살고 다시 자대로 돌아와 나머지 의무복무 기간까지 마치고 나오면 수년이 걸릴 텐데’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또 전과자가 되면 고시까지 합격해 얻은 자리인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복직할 수 없게 돼 인생을 망친다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습니다.
‘이렇게 내 인생이 우습게 무너진다는 말인가’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책임을 벗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중대장에게 제 책임을 상병들에게 전가시키는 보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상병들에게 ‘구타하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내 책임이 없다고 하고 상병들을 고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제 책임은 대폭 감소돼 남한산성까지 안 가도 되겠지만 부하인 상병들은 설령 신 일병이 기절한 상태에서 깨어나 병신이 안 되고 살아난다 해도 모두 남한산성행이 될 것이었습니다.
괴롭고 두려웠습니다. 보고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전화통을 보면서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에 몇 번이나 의자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화기를 중대장 집으로 돌렸다. 중대장이 나왔다. “송 병장, 별 일 없나?”하는 말을 듣는데 제 눈앞에 상병들의 얼굴이 아른거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비겁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외쳤습니다.
“예, 근무 중 이상 무”
저는 부대 내에 비상을 걸어 구타사실이 밖에 알려지지 않도록 보안을 유지케 했습니다. 그리고 한의학과에 다니다 군에 온 졸병에게 침을 놓고 지압을 하는 등 치료를 하게 했습니다.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하나님! 신 일병을 살려주십시오.”
사실 당시에는 신 일병이 살아나는 것이 제가 사는 길이었습니다. 새벽 두세시 쯤 돼 하얗던 신 일병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눈을 뜨고 부스스 일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송 병장님 배가 고픈데 먹을 것 없어요?”
저는 기쁨의 울음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졸병에게 책임을 전가시키지 않고 상관으로서 떳떳하게 행동했다는 뿌듯함이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병장제대 후 다시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복직을 한 나는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 투자계획과에 근무하던 시절, 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실무 입안자의 입장에서 국가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았습니다. 그중 광양 컨테이너 항구 건설을 비롯해 호남고속도로 4차선 확충 계획을 입안하고 관련계획이 예산에 반영되도록 일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제는 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중앙고속도로의 명칭은 경제기획원 사무관 시절 제가 직접 작명을 했고, 경부고속전철 연구용역을 최초로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교통개발연구원이라는 정부연구기관을 발족시켰습니다. 논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교통관련 용역으로 83년 당시 63억원이나 외국에 나갔는데, 한 해 비용이면 우리 인력을 써서 교통관련 연구소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혼신의 힘을 다해 맡은 바 업무에 진력했습니다. 사무실에서 밤 12시를 넘기는 것은 예사였고 사무실의 긴 소파에서 잠깐 눈을 붙이며 밤을 새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후 저는 동기생 중 가장 먼저 과장으로 승진했습니다. 과장 승진 후 대전 엑스포 조직위에 파견돼 해외유치부장, 홍보부장으로 일했습니다. 이후 청와대 경제비서실 과장, 경제기획원 공보 담당관, 공정위 과장 등 경제 정책을 다루는 정부 내 주요 요직을 거쳤고 틈틈이 후배들을 위해 서울대, 연세대 등에서 경제정책론, 경제원론, 공기업론 등을 가르치는 역할도 했습니다.
송하성 박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