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유학 시절… 깡다구로 시작한 박사과정
제 과장 승진 기념패에 써 있던 문구대로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도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일에서도 그러했지만 학문을 하는 데서도 더욱 악착같았습니다. 과거 패배주의, 운명주의에 젖게 하였던 실패의 경험이 저에게 더욱 도전정신을 갖게 했습니다.1985년에 프랑스 정부 장학생으로 뽑혀 파리에 있는 소르본느대학(파리1대학)박사과정에 응시하게 되었습니다. 정식 입학을 하기 전 알프스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그레노블이라는 중소도시에서 불어 어학연수를 밟았습니다. 우리나라 춘천과 흡사한 호반도시인 그레노블에서 일주일 내내 불어 공부를 했고 주말이면 인근 교회에 나가 예배를 보는 등 불어 공부를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붓기 시작했습니다. 시간 날 때면 인근 마을로 내려가 아무나 붙잡고 그 동안 배운 초보적인 불어회화 연습을 하는가 하면 잠을 잘 때 불어로 꿈을 꾸며 불어 공부만이 인생의 모든 것처럼 매달렸습니다.
그렇지만 전혀 생소했던 불어와 불어권 대학에서 박사 과정의 공부를 한다는 것은 저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우선 필기시험은 전공인 경제학이기 때문에 무조건 암기한 것을 답안지에 적어나가 문제가 없었지만 면접이 커다란 난관이었습니다. 깐깐한 외모를 갖고 있었던 지도교수 장 베나르(Jean Benard)교수는 몇 마디 말을 건네고는 저의 불어 수준이 형편없다는 것을 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불어 실력으로는 박사 과정 학업을 해나갈 수 없는 지경이다. 설사 합격 시켜 준다고 해도 수업에서 낙방할 것이다”며 노골적으로 불합격 통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순간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이대로 귀국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면접시험에 나가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노트 앞 뒤장에 무엇을 써서 외워가지고 갔습니다. 그것도 외우는데 4일이나 걸렸습니다. ‘이 말로 교수를 설득해 나를 합격시키게 하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교수가 떨어뜨린다는 말에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간곡히, 그리고 단호하게 큰 소리로 호소했습니다. “믿고 일을 해나간다면 어떤 일이든지 해나갈 수 있소(Tout est Possible a celui gui croit.). 만일 당신이 나를 합격만 시켜주신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 따라 갈 것이니 기회를 주시오.” 화가 나서 그런지 불어가 더욱 잘 되는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더듬거리지 않고 큰 소리로 데모하듯이 외쳤습니다.
동양에서 온 외국인 학생의 예기치 않은 이 같은 당돌한 제의에 교수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리고는 무슨 말인가 화난 것 같이 내뱉었습니다. 제 실력으로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TV를 자주 보면 불어가 빨리 는다”는 등 조금 누그러진 몇 마디를 하는 것은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 뒷장에 써서 외운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내가 불어만 못한다 뿐이지 한국에서는 한가닥 했소. 경제학도 잘하고 고시도 붙었고… 그러니 불어 못한다고 나를 폄하하지 말고 붙여만 준다면 열심히 하겠소.”
이어 무거운 침묵이 잠시 이어졌습니다. 교수는 무엇인가 결심한 듯이 입술을 꼭 다물더니 분명한 목소리로 크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열정적인 태도에 감동했소. 예외적으로 당신을 합격시키겠소(Exceptionnellement Je vous accept).”
이렇게 하여 저의 박사과정은 시작의 닻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다른 한국 응시자는 떨어진 사람도 많았습니다. 제가 가진 열정이 뜨거운 기운으로 교수를 덮었던 것입니다. 이런 해프닝이라면 해프닝이라고 할 수 있는 일들이 저에겐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저 해프닝으로 넘겨 버리기엔 제가 느꼈던 초조함과 갈등은 너무 컸습니다. 만약 교수의 말대로 ‘불가능하다’는 평가에 주눅들어 포기하였다면 저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더욱 좌절감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믿음과 의지가 있다면 불가능은 없다’는 신념은 이때 더욱 확고히 되었으며 현재도 좋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송하성 박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