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4개월만에 박사학위 취득… 르몽드지에 실려
박사과정 입학 후 저는 시간 부족과 어학에 대한 약점 등 산적한 난제를 극복하고 박사 예비코스(DEA) 예비논문에서 20점 만점에 16점을 얻어 수석으로 통과를 했습니다. 그때 제 담당교수는 저를 ‘몬아미(mon ami)’라고 부르며 예우하여 주었습니다. 프랑스 말 ‘몬아미’는 내 친구라는 뜻입니다. 이는 친구라는 뜻을 넘어 제가 교수에게 인정받게 됐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3년 4개월이라는 최단 기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같은 학위취득 사실은 1988년 9월 28일자 프랑스의 권위지 르몽드지(紙)에 실렸습니다. 그 이후 프랑스에 유학 온 한국 학생들 사이에서 저는 ‘전설적인 사람’으로 입에 오르내렸습니다.박사 학위를 얻어 귀국한 뒤에도 제가 부족한 것을 잘 아는 저는 늘 그래왔듯이 공직 생활뿐 아니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밤에는 시간을 내어 ‘송하성 교수님!’이란 호칭을 들으며 강의를 했습니다. 경제실무자들에게 현실적인 경제학을 가르치는 것이었으므로 학생들은 귀담아 들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배운 경제학 이론과 경제정책 실무를 학생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실질적으로 국가경제발전에 활용할 수 있는 강의가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특히 저는 어느 강의이건 꿈과 희망을 이야기 했습니다. 경제학이 형이하학이지만, 경제학자 루이스의 말대로 정신적 자산이 뒷받침 되지 않는 경제적 번영은 모래성과 같다는 점을 역설했습니다.
제가 처음 귀에 익지 않은 ‘교수님’이란 호칭을 듣게 된 것은 1989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에서 경제원론을 강의하면서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지금도 ‘이수회(매달 두 번째 수요일에 만나는 모임)’를 조직해 만나고 있습니다. 제가 대학강단에 서서 강의를 하고 열심히 들어주는 학생들을 바라볼 때의 가슴벅참은 이루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연세대에서 비롯된 강의는 저의 모교인 성균관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과정 등에서 계속됐고 저는 차츰 교수라는 칭호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강의를 하려면 많은 공부와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저는 틈틈이 학술지에 영어논문 2편, 한국어논문 6편을 발표하고 ‘미국경쟁법 가이드’ 등의 전문서적을 펴내는 등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학자가 아닌 공무원으로서 공무와 연구는 상호 보완적이었을 뿐 아니라 현실경제를 이끌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이란 생각에 더욱 최선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내던 중 1992년 과장으로 승진해 대전 엑스포조직위원회로 파견이 되었습니다. 제 처음 보직은 엑스포 조직위원회 해외유치 부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오명 위원장은 저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송 부장, 대전 엑스포에 43여개국이 참여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하든 미국을 포함해 100개국이 넘도록 하시오.”
애초 참여 대상국가의 두 배 반이나 넘는 수치로 참가국을 늘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고심 끝에 해외유치부장으로서 짐을 꾸리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엑스포 조직위나 제 힘으로만 될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외교부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외교부에 공문을 보내 당시 본부에 와있었던 김석규 대사(전 이태리대사, 그후 러시아·일본 대사 역임)를 모셔와 같이 남미와 미국을 유치하러 출장을 갔습니다. 브라질부터 시작하여 볼리비아, 콜롬비아, 과태말라 등을 돌아다녔습니다. 이런 개도국들의 외무장관이나 통상장관을 만나 한국 대전에서 열리는 엑스포에 참가할 경우 무슨 효과가 있고 어떻게 좋고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엑스포의 의미조차 잘 모르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기에 홍보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중․남미 유치를 마치고 뉴욕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워싱턴으로 가서 미국공보처(USIS)를 찾았습니다. 클린턴 정부는 중진국 한국에서 열리는 대전 엑스포에 참여할 의사는 물론, 예산조차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정기적으로 열리는 등록박람회가 아니고 특별히 인정해 준 인정박람회이니만큼 참석해야 한다는 의무감마저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미국을 무슨 수로 참가하게 할까’ 하는 고심이 생겼지만 여러 난관 끝에 미국을 설득해 성조기를 대전 엑스포장에 꽂았습니다.
송하성 박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