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와 네팔, 홍콩을 거치며 1999년을 맞다
델리-카트만두-홍콩1999년 1월 1일, 델리, 십자가를 전함
작년에도 연말을 외국에서 보내고(이태리) 신정을 맞이했는데 올해도 그렇게 됐다. 오늘은 1999년 1월 1일. 델리에서 4일간의 집회를 마치고 카트만두(네팔)로 가고 있다. 원래 비행기가 오전 10시 30분 출발인데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이륙했다. 나와 처음 인도 땅과 네팔 땅을 밟아보는 내 아내와 Y형제, Z형제와 그의 아들(아이의 여권 만료라서 외국에 나갔다 들어와야 한다)이 함께 있어서 긴 시간 공항에서 견디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아내는 도착 직후부터 감기 몸살이 심하게 걸려서 이삼 일 동안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호텔 방에서 앓아누웠다. 왜냐하면 델리 일기가 워낙 쌀쌀한데다가 습기가 많고 밤에 호텔 방이 너무 추웠기 때문이다. 첫날 오자마자 감기에 걸리더니 지금까지 기침을 심하게 하고 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 한번은 방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많이 울고 있었는데 많은 상념이 있었을 것 같다.
네팔에서 형제들이 집회를 예비해 놓고(오후 4시) 많이 기다릴 것을 생각하면서 Y형제는 평안을 잃고 어려워했다. Y형제와 많은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델리에서는 인수는 많지 않아도 꼼꼼하게 집회를 한 셈이다. B 자매님의 실제적인 봉사가 좋았고 수원에서 온 이 모(某)형제와의 만남도 좋았다. 젊은 형제들도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이지만 좋은 봉사를 하고 있었다.
1999년이 되면서 내 나이는 쉰 살이 되었고, 주님이 승천하신지 2000년이 다 되어 가서 오실 날이 멀지 않음을 느낀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는 제자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분이 속히 오시기만을 원한다.
네팔에서, 요한의 글에 나타난 생명에 관하여
오랜만에(9개월) 네팔에 와서 성도들을 만났다. 그 동안 많이 자란 사람도 있고 약간 뒤로 물러간 사람도 있었다. 이번에 집회는 모두 8번 했고, 산에서까지 합하면 아홉 번했다. 이번에는 요한복음과 요한서신과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생명에 관하여 전했다. 그들에게 약간 어려운 부분도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어진다.
성도들 수는 50-60명 정도이고 두세 도시에서 함께 모였다. 주님의 은혜가 많았던 기간이었다.
어려운 사정들
1. 발크시낫 가족: 원래 목사 부부(현재도 한 무리 30명 정도 인도함). 돈이 없어 집세, 학비, 식사비도 못 내고 어려운 삶을 산다.
2. 룹바: 12살짜리 소녀인데 담석이 큰 것 4개가 있어서 몸 전체가 아프고 못 먹고 해서 거의 죽을 뻔했다. 병원에 갈 돈도 없어서 수술은(500불 정도면 한다는데) 못하고 비쩍 말라서 살이라곤 없는 얼굴인데 주님을 무척 사랑하고 집회마다 빠지지 않는다.
3. 지방 형제들: 생활이 어려울 뿐 아니라 지방으로 중국의 모택동 사상이 들어와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한다는데 위험한 상황이 말이 아니다.
몇 가지 조정
1. C형제의 포카라 이주
2. 문서사역 시작. 컥 앤드라, 레크낫, 차트라 특별 집회 메시지 딕테이션 시작함
3. 카트만두 교회 인도하는 장로들과 동역자들의 은사의 나타남을 도와주기로 함
1월 6일, 주님, 이 안개를 치워주소서
모두 히말라야가 바라보이는 곳으로 나가서 야외 교제를 가짐. 버스를 빌렸는데 Z형제는 한국의 죄수들 실어나는 것만도 못하다고 했지만 사고는 없었다(40여명). 가는 길에 안개가 너무 자욱해서 전방의 시야가 어려워 앞의 차를 볼 수 없고 더욱이 중앙선도 없는 길에서 차량 충돌의 위험이 매우 느껴졌다. 그리고 모처럼 가는 야외 일정에 안개가 이렇게 자욱하면 외부의 경치와 히말라야를 전연 볼 수 없게 된다.
나는 아내와 맨 앞자리에 탑승하였고 주님께 기도했다. “주님, 저희들이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또한 주님 당신이 지으신 창조물을 잘 볼 수 있도록 이 안개를 치워주옵소서.” 나는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은 이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었다.
기도를 마치고 5분도 안 되어 기적과 같이 힘차게 해가 솟아나고 있었다. 주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 했다. ‘그래, 내가 치워주마. 나의 능력으로.’ 속에서 매우 힘이 느껴지고 주님께 대한 경배가 가득했다. 그때의 시간은 오전 9시 30분쯤 되었다.
그 후 나는 사단의 속삭임 때문에 조금 불신의 악한 생각을 하였다. ‘아침에 끼었던 안개가 자연히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너의 기도 때문이냐?’ 라고….
1월 7일, 하늘을 쳐다보면서 주님께 감사하다
우리가 탄 차는 약간만 경사가 져도 늙은이 골골대는 소리를 내며 기어올라가는 정도였다. 자연히 가슴에 힘이 들어가고 내려서 밀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캄보디아, 인도 등과 같이 중앙선이 없는 도로, 앞에서 오는 차와 거의 가까이 와서야 살짝살짝 비껴가는 운전이라 우리 같은 사람은 정면에서 차가 막 달려오면 긴장되고 옆에서 차가 지나가도 몸이 자연히 틀어진다. 그래서 또 기도했다. “무사하게 하여 주옵소서.”
어제 저녁에 발크셔낫 형제 가정이(열쇠를 잃어버려서 함께 돌아오지 못함) 무사히 돌아왔고 감사가 있었다. 홍콩을 통해 귀국하려고 공항에 나왔는데 시간은 11-12시쯤 되었고 비행기는 거의 오후 1시쯤 뜨게 되었는데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안개가 개이지 않았다. 나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주님께 감사했다.
‘아침 안개가 당연히 개이는 것은 아니다. 보라, 12시가 넘어도 자욱한 안개를!’
1월 8일, 홍콩, 형제들의 접대를 받다
어젯밤 홍콩 도착. T형제라는 젊은 형제 하나가 나와서 나와 내 아내를 영접하고 한 시간 가량 버스를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조그만 방을 내주어 잘 수 있도록 해주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간단한 조찬을 하고 새벽 공기를 가르며 공항에 왔는데 T형제는 몹시 피곤한 상태이고 아내는 아직 감기가 낫지 않은 상태라 가끔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가래를 뱉어냈다.
나는 4일 후에 다시 추운 중국 하얼빈을 가야 하므로 감기에 조심해야 했다. 밤에도 내복에 셔츠까지 입고 잤으며 물을 계속 먹어댔다. 서울 온도는 영하 6℃이다.
다음에는 사역지 일기 7이 이어집니다.
유동근 목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