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교수]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 (9)
나사렛 예수의 복음 사역은 당시 역사적으로 있었던 종교적 정치적인 당파들의 맥락 속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조명된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시기에 있었던 유대교의 당파들은 에세네파, 사두개파, 바리새파, 헤롯파, 열심당 등이었다.
에세네파는 당시 공적 유대교적 삶으로부터 퇴각한 은둔 공동체였다. 사두개파는 제사장 계층으로 세속적 권력에 깊이 침잠했다. 바리새파는 제사, 십일조, 경건 등에 관심을 가졌었으나 속사람의 변화보다는 사람의 칭찬을 구하는 종교적 외형, 체면 등을 중시하였다. 헤롯파는 세속적인 권력을 잡은 헤롯 왕권을 지지하고 보존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열심당은 당시 로마 지배세력에 대한 무력항쟁으로 유다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역사적 예수의 복음사역은 당시 주어진 유대사회의 당파들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전개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사역을 하시면서 역사적 예수는 불가피하게 이들 종교적 정치적 당파 무리들과의 조우(遭遇)하게 되고 갈등관계를 이루었다. 하나님은 그 시대에 활동한 이들 당파들을 그분의 섭리를 이루시는 데 사용하셨던 것이다.
1. 에세네파
에세네인들(Essenes)은 주전(主前) 130-주후 70년경 시기에 광야에서 고립된 집단생활을 하였다. 스스로 구별된 자라고 자처했던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대해 철저하지 못함을 비판하면서 에세네인들은 광야로 도피한다. 에세네파는 세속과의 철저한 단절 속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에세네파 가운데 여러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쿰란이라는 마을에서 집단생활을 한 쿰란공동체(Qumran community)는 보다 엄격한 율법공동체였다. 쿰란공동체는 구약성서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에서 드려지는 희생제사는 거부하였다. 그들은 고유한 정결의식을 거행했으며 태양력을 사용하는 절기들을 제정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이 세우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였다. 이들은 다가오는 의의 교사(teacher of Righteousness)를 대망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에세네파에서 나온 자였다. 나사렛 출신의 예수는 에세네파의 추종자가 아니었고 이들이 바라는 의의 교사도 아니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2. 사두개파
사두개인들(Sadduees)은 예수와는 가장 공통성이 없는 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제사장 가문의 부유계층이었고 귀족계층 출신이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일을 행했으며, 공회에서 지도적인 당파로서 정치적인 책임을 주로 맡았다. 사두개인들은 마카비 형제가 반란을 일으켜 세운 제사장 왕국인 하스모니아 왕조the Hasmonian dynasty)를 지지하였다. 하스모니아 왕조가 붕괴하는 시기에 제사장들과 성전기관의 요원들은 사두개파로부터 나왔다. 사두개인들은 일반 제사장 신분 출신의 다양한 사회계층에 속했다. 일반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할 일이 없는 때에는 농장에서 일함으로써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였다. 사두개인들은 수가 아주 많아서 큰 축제를 제외하곤 제사장은 단지 반년에 한 주일만 성전에서 봉사하였다.
사두개파는 신학적으로 “옛-종교”(the old-time religion)가 믿는 것을 추종하는 보수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모세 율법에 문자적으로 포함된 것을 넘어서는 가르침은 거부했다. 이들은 바리새파를 옛 율법을 현대적 조건에 적용하기로 고안된 구전(口傳)을 가진 혁신주의자들(innovators)로 간주하였다. 사두개파는 몸의 부활에 대한 바리새파의 신앙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신(新) 교리”라고 거부하였다. 구약의 다니엘서는 분명히 부활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사두개파는 다니엘서는 밀의서적 경전(the canon of sacred writings)의 한 부분이라고 거부하였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과 조우(遭遇)하는 시기는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주간(週間)을 보내는 동안 성전 뜰에서였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관한 어려운 문제를 예수에게 제시하였다. 이들은 부활을 믿지 아니하므로 일찍 죽은 일곱형제의 예를 들면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였다: 칠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어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 동생들이 차례로 모세의 법에 따라 그 형의 아내를 아내로 맞이 하였는데, 부활 때에 그녀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고 대답하여 무리를 놀라게 하셨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의 대답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눅 20:35-36). 예수는 이들이 지고의 권위라고 생각한 모세오경을 근거로 이들에게 대답하였다. 바리새인 중의 약간의 서기관은 예수의 대답에 감명을 받아서 칭찬을 억제할 수 없었다: “잘 말하였습니다. 선생님”(눅 20:39).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곧바로 예루살렘 교회를 형성한 예수의 제자들은 주로 사두개파의 반대에 부딪힌다. 그 이유는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들이 바로 사두개파의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의 추종자들을 공감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사두개파는 예수 제자들의 공적 설교에 대하여는 특별히 예외로 하고 문제삼지 않았다. 예수 제자들은 예수가 마지막 때 부활의 기대 속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전파하였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3. 바리새파
바리새인들(Pharisees)은 예수와 공통점이 많은 자들이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만날 때마다 논쟁에 휩싸였다. 이 이유는 부활, 구원, 정결 등 종교적 의무와 교리적 핵심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 제자들의 활동은 바리새파들에 의하여는 장려되지는 않았으나 허용되었다. 예컨데 산헤드린에서 제자들의 활동에 대하여 엄한 제재를 하는 것에 관하여 논의되었을 때 그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바리새인이요 바리새파의 지도자인 가말리엘(Gamaliel)은 말한다: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 5:38-39). 교법사인 가말리엘은 건전한 바리새파의 교리를 천명하였다: 인간이 어떻게 할찌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 서게 될 것이다. 가말리엘의 이러한 말은 산헤드린의 그의 동료들의 다수를 설득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가말리엘의 제자인 한 젊은 바리새인, 바울은 제자들의 새로운 교회운동이 조상의 유전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으로 보고 진압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서기관들은 율법을 특별히 배운 학자들이거나 관리들이었다. 이들은 율법사들이었고 이들 대부분은 바리새인들이었다. 지도적인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의 우두머리였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라고 비난하였다. 이 위선은 종교적 의무에 관련되어졌다. 음식 제한, 결례, 십일조, 기도, 금식 등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마음에서는 진정한 경건이 없으면서 외면적으로 이러한 종교적 의무를 행함으로써 칭찬을 받고자 하였다. 식사 전에 손 씻는 결례(潔禮)를 행하지 않는다는 바리새인의 비난에 대하여 예수님은 겉으로는 깨끗하나 마음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함에 대하여 나무라신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눅 11:37-41).
그리고 예수님은 종교적 십일조는 드리나 공의와 인자를 저버리는 행위에 대하여 나무라신다: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버리는도다. 그러니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눅 11:42). 그리고 사람들의 칭찬에만 관심을 가지고 마음의 순결과 경건이 죽어버린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책망하신다: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화 있을 찐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눅 11:43-44).
4. 헤롯파
헤롯추종자들(Herodians)은 헤롯 왕가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하여 애썼다. 예수의 사역 동안 헤롯 가족 중 2명이 이스라엘 내(內)에 또는 가까이 있는 공직을 차지했다. 헤롯 안티파스(Antipas)는 갈릴리와 페레카의 영주이었고, 그의 형제 필립(Philip)은 갈릴리 호수의 동쪽과 북동쪽 지역의 영주이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나는 헤롯 추종자들은 헤롯 안티파스의 지지자들이다. 헤롯의 지위에 대한 위협이 가해지면 처리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그러한 위협이 예수가 보내신 12제자들의 갈릴리 선교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헤롯추종자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헤롯의 안전에 있어서 가져오는 위협을 제거하는 것을 이들의 의무로 생각했다.
마가복음(12:13-17), 누가복음(20:2-26), 마태복음(22:15-22)에서는 바리새파와 헤롯사람들이 가이사에게 세금바치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를 시험한다. 이들은 예수의 대답을 책잡아 예수를 열심당에게 넘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막 12:17)라는 명답을 제시하고 곤경을 벗어나신다.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그의 제자들에게 당부하였다(막8:15). 제자들은 이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적대적인 세력들에 관하여 언급하신 것이다. 예수는 헤롯이 자기를 죽이고자 한다고 갈릴리에서 떠나도록 경고를 받았다. 이 때 예수는 헤롯을 “여우”라고 지칭하였다: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3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2-33). 헤롯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는 안전하다고 느꼈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예루살렘 바깥에서 죽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다.
5. 열심당
열심당(Zealots)은 1세기 유대교의 영향력 있는 당파이었다. 열심당은 6세기에 유대가 로마제국의 속주(屬州)로 병합되었을 때 로마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갈릴리 사람 유다(Judas)에 의하여 창안된 철학을 영구화 하였다. 유다는 비느하스(Phinehas), 엘리아, 마타디아스(Mattathias)에 의하여 세워진 열심의 전통을 따르면서 이스라엘 하나님 때문에 열심이라고 자신을 선언하였다(S. G. F. Branden, Jesus and the Zealot, Manchester: Manchester Univ. Press, 1967, 16). 유다는 약속의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 지배자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이전의 열심당보다 더 과격하게 나갔다.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예수에게 던져진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가(막 12:13-17)라는 질문의 배경이었다. 마가는 예수 대신 풀려난 바라바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막 15:7) 빌라도는 명절의 전례대로 예수를 놓아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요청한다. 그리하여 열심당원 바라바 대신에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 “빌라도가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막 15:15)
인간 역사는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서 인간 각 당파들은 그들의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이들이 자기들의 역할을 하도록 하시면서 하나님의 구속섭리를 위하여 일하도록 사용하신다. 각 당파들은 전적으로 자기들의 정치적 종교적 유익을 위하여 일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사업을 이루는데 일조하게 된다. 예수를 고발한 자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고, 그를 사형선고 하도록 한 자들은 헤롯파이었고, 열심당원 바라바는 예수 대신 풀려난다. 에세네파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경건한 자들이었다. 하나님은 강요하시지 않으신다. 단지 각 당파들의 이해관계가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추어 돌아 가도록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신다. 여기에 하나님의 구속의 오묘한 섭리와 경륜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