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에 임했던 분열의 영을 치료하게 하신 성령님
이태리
나는 이태리와 불가리아를 방문코자 하였지만 두 가지 문제로 4년 동안 방문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유럽에 가려면 여비가 만만치 않게 들었다. 적어도 그 나라들을 방문하려면 통역자를 포함하여 서너 사람이 가야하는데 돈이 생기지 않았고 통역하던 형제들도 하나 둘씩 사라져서 마땅치 않던 터였다. 주된 문제는 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공부를 하던 한 여집사님이 내가 유럽의 교회들을 돌아보고자하는 소원을 알고 자기 남편과 함께 갈 수 있게 해달라면서 여비 전액을 감당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리고 구백만 원이나 되는 돈을 통장으로 송금했다. 나는 즉시 이것이 주님이 나를 유럽으로 보내시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가고자 하는 뜻이 내게 있고 그곳의 필요도 있으며 물질도 공급이 됐으니 이는 분명 주님의 인도였다. 나는 즉시 표를 예약하고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희한하게도 함께 가기로 한 여집사님 남편은 사정이 생겨서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집사님은 함께하지 못해도 기꺼이 우리의 선교에 물질적인 보조를 하기 원했다.
로마 공항에 내리자 엔조와 리노 형제와 B형제가 나와서 맞아줬다. 거기서 4년만에 반가운 재회를 하고 승용차로 함께 나폴리로 향했다. 나는 차 안에서 나폴리로 가면서 기묘한 느낌이 있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분명 4년 만에 나폴리라는 외국의 도시로 향하는데 너무나 오랜만에 고향에 가는 기분이었다. 내 아내도 똑같은 말을 했다. 그리운 성도들이 있는 곳이 우리의 고향이 아닌가? 우리는 하늘이 우리의 본향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진리적으로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곳에 우리 주님과 모든 성도들이 다 있기 때문이다.
도착해서 성도들을 만나고 반가운 교제를 나누었다. 제일 마음이 아픈 것은 그들의 자녀들이 많이 자랐는데 주 안에서 양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세상의 청년들과 별다를 것 없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고, 오직 하나 루치아 자매만이 주님의 영을 가지고 집회 때마다 참석하며 같이 해주고 있었다. 나는 저들을 하나하나 불러서 기도해주며 다음에 한국에 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떠나기 전 나는 형제들에게 마리아 자매가 잠들어 있는 묘소를 가보자고 했다. 그곳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납골당이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형제들과 함께 조용히 찬송을 불렀다. 유난히 마리아 자매가 사랑하던 막내 아들 다비데는 멀리 앉아 눈물을 짓고 있었다.
갈 때마다 들리는 보스꼬 공원은 여전히 형제들과 함께 갔고 산따르피노의 리노 형제는 항상 함께 해주었다. 그러나 리노는 아직 30대의 젊은 형제임에도 옛날과 다름없이 조깅하는 우리를 따를 수 없다고 엄살을 하였다. 그곳에 가면 언제나 한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나폴리 해변을 바라보며 높이 솟아오른 베수비오 산을 바라보게 된다. 이는 거의 2천년 전 폼페이라는 한 도시를 쓸어버린 화산을 분출시킨 산이며, 지금도 당시 장면을 보여주는 수많은 유적들이 있다. 그렇게 유서깊은 도시에 하나님의 교회가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오랜 세월이 지났고 그들에게도 많은 사람들의 회유와 유혹이 있었지만 꿋꿋이 견디며 가난하더라도 믿음의 길을 굳게 가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특히 나는 그들의 예배 처소 서재에 이태리어로 번역된 나의 서적들이 그대로 비치돼 있는 것을 보고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이는 그들이 여전히 우리에 대한 신뢰와 사랑과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너댓 번의 공적인 집회는 매우 좋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었다. 나는 그들과의 달콤하고 아름다운 교제를 뒤로 하고 로마로 와서 소피아 공항으로 날아갔다. 그리하여 역시 4년 만에 불가리아 땅을 밟게 되었다.
불가리아
불가리아도 4년 만에 찾아나서는 길이다. 이태리 상황도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불가리아는 더욱 힘든 상황이었다. 불가리아도 옛날 함께 사역하던 형제가 우리를 떠나서 자신의 일을 따로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그곳의 형제들을 분열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보낸 선교사이기에 나를 떠났으면 그 임지를 주님과 우리에게 맡겨야 할텐데 계속 성도들을 자신이 책임져야 할 자들로 여기고 사역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유럽의 다른 나라에 있으면서 전화로, 또는 방문으로 그들을 돌보고 있었다.
문제는 불가리아 성도들 전체가 그를 따라주면 좋으련만 대다수의 성도들이 그 형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거기에 자연 분열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형제는 유감스럽게도 불가리아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판단의 말을 많이 하였기에 그 말들은 자연 불가리아 성도들에게 퍼져 많은 의심을 갖고 나를 떠나게 만들었다.
실상 나는 돈도 돈이었지만 그렇게 편안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에게 가지 않기를 바랬다. 내가 간다면 자연히 분열의 상황이 더욱 확고해질 것이 우려였다. 그리고 그 선교의 일을 담당했던 형제가 그의 말처럼 그들을 많이 사랑하는 것도 사실이기에 그가 목을 매고 형제들을 붙잡으려하는 노력을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그 형제는 혼자 3-4년 동안 그곳을 드나들며 어떤 일을 해놓았고 나는 한 번도 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4년이 지난 후 그들의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 한 무리는 절대로 그들과 화합할 수 없는 무리가 되어 버렸다. 나는 그들의 수가 얼마인지 모르지만 그들을 만나러 그들에게 가고자 했다. 그 인수가 3-4명이 될지 10명이 될지 모르는 판이었다.
불가리아에 도착하니 형제들 몇몇이 공항에 나왔다. 다른 쪽 형제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큰 식당을 하나 빌려서 모임을 가졌다. 첫 집회에 가니 두 편으로 갈라진 형제들이 다 함께 모였다. 불가리아 성도들은 유난히 찬송을 잘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들의 입술에 그 감미롭던 찬양이 없어졌다. 그리고 두 편으로 나뉘어진 형제들은 식당의 중간의 파티션을 두고 나누어 앉아 서로 쳐다보지도 않으려 했다.
나는 강하게 말씀을 선포했다. 주로 창세기 1장의 말씀이었고, 히브리서 2장과 시편 8편의 말씀을 연결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영광스럽고 복된 목적을 전했다. 나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불가리아에서 새롭게 일하고자 한다. 다만 우리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올 수 있고 들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옛 일과 연결지어서 일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고자 한다고 했다. 내가 10년 전 시작했지만 이제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자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시편 8편의 말씀을 전하면서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찬양으로 원수와 보수자의 입을 막으시려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였다.
저들은 유감스럽게도 많은 이론들과 말들이 있었지만 찬양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누가 당신들의 그 어린 아이와 젖먹이 같이 천진하고 순수한 모습을 지금처럼 나이 먹고 늙어버린, 그래서 기쁨이 없는 얼굴을 만들어놓았냐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쁨이 없는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놀랍게도 한 두 집회 후에 성도들은 완전히 회복이 되었다. 나는 성령으로 충만 되어 하나된 그 상태를 보면서 하나님께 경배드렸다. 그렇게 1-2년 이상 나뉘어진 사람들 중에는 아들과 아버지 사이도 있었다. 한 아버지는 아들과 포옹하면서 나에게 “저는 아들을 일 년만에 안아봅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분열적인 사상 속에 서로 어려운 시간을 가졌다.
그런 속에서 가장 나를 슬프게 한 것은 한 자매가 죄에 빠진 일이었다. 나와 함께 하는 인도자들은 그 자매를 죄로부터 돌이키도록 애를 썼다. 그러나 반대편 형제들은 무조건 그 자매와 부모를 감싸고 돌았다. 그러니 자연 그 자매는 그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고린도전서의 분열의 상황은 범죄에 길을 내어주는 것이 되었다. 교회에 분열이 일어나면 분열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타의 죄들이 기회를 틈타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매우 주시하고 있었으며 교회에 들어온 마귀를 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결국 자매는 집회의 말씀의 공급과 성령의 빛으로 말미암아 회개하게 되었고 내가 2006년도 다시 방문하였을 때는 완전히 죄에서 벗어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때 공항에 온 교회의 지도자들이 다 나왔고 소피아 교회는 여섯 소모임을 갖기로 하고 그룹마다 지역 이름에 따라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것이 2004년 5-6월에 있었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