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는 과거 함께 동역하던 동역자의 변심으로 교회가 둘로 나뉘어진 상태였다. 역시 4년 동안 가지 못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자나, 가립, 일리야, 에밀리야, 익죠, 비쎄르까 등이 나왔다. 불가리아는 이태리보다 성도들의 경제 상황이 나았다. 공항에 가니 차도 몇 대 나오고 미니 버스도 나왔다. 단초 아버지 스태프쵸 형제, 어머니 다나 자매 집에 숙소를 정했다.
첫 집회에 가니 양편 형제자매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말씀은 창세기 1장에서부터였다. 첫 집회부터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일어났다. 두번째 집회에 시편 8편을 전했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동안 1년 이상 따로 떨어져 말도 하지 않고 마주쳐도 얼굴도 대하지 않던 성도들이 눈물과 기쁨으로 어우러져 찬송하며 즐거워했다. 그들은 이런 갑작스런 변화를 인하여 스스로도 놀라고 있는 듯했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Joy returned again among them!” 사탄은 부끄럽게 도망가고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다시 한 번 맛보았다.
셋째날은 블로브디프라는 불가리아 옛 수도에 갔다. 그곳은 몇 년 전 가립과 자나가 가서 개척한 교회가 있었다. 인근 빠다르직 성도들도 함께했다. 그곳 성도들은 나를 처음 보는데도 얼마나 소문을 들었는지 이미 그들 가운데 유명해져 있었다. 한 자매는 내 사진을 구해서 거실에 걸어 놓았는데 죄를 지을 때마다 사진을 바라보곤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거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티벳으로 말하면 달라이 라마라는 사람이 이런 거 아닌가 싶었다.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이어서 그 자매가 하는 말이 “그런데 목사님 실물을 보니까 되게 왜소하고 그렇게 신령해 보이지도 않는 게 환상이 완전히 다 깨져버렸다”고 했다. 나는 조금 아쉬우면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남편은 불가리아의 유명한 복싱 영웅이었다.
나는 설교하기 위해 일어나 몇 마디 불가리아 말로 인사를 하고 한국말로 찬송을 부르고, 말씀은 믿음에 대해 전했다. 많은 사람이 반응했고 이들의 느낌은 매우 섬세했다.
이들은 분열의 고통을 맛보고 하나로 회복하는 기쁨도 맛보았다. 과정을 통해 오히려 성숙했다. 사역자에 대한 감상도 더욱 생겨났다. 머쓱한 사람도 있었고 실망했다가 되찾은 기쁨도 있었다. 단초는 한국에 오겠다고 했다. 공항에는 섬기는 자들이 다 나와서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 소피아 교회는 주일날 네 군데서 모인다. 두르즈바 모임, 화꼴테타 모임, 필립꼽지 모임, 블라다야 모임. 찬양과 감사를 주님께 드린다.
자나와 가립에 대하여
▲정희근 선교사와 요안나 선교사 부부(왼쪽에서 두번째, 세번째).
자나는 불가리아인이지만 원래 집시이다. 가립은 터키 사람이다. 두 사람은 성경의 아굴라, 브리스가처럼 어디든지 가서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자들이다. 그들이 당시 바울 사도를 도와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사역을 하였듯이 자나와 가립은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는 사역을 하고 있다. 이들은 내가 이태리 상황을 늘 걱정하는 것을 알고 불가리아 일을 제쳐두고 이태리로 와서 나폴리 형제들과 함께 거하게 되었다. 이들은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의 교회가 우리 가운데 있던 한 형제의 배반으로 어렵게 됐을 때 불가리아의 구 수도인 플로브디프와 빼드리찌히 도시로 다니며 복음을 전해 교회를 세우는 일을 했다.
내가 2004년 불가리아를 방문했을 때 플로브디프에 방문해 집회를 가질 때 불가리아의 복싱 금메달리스트(2004 아테네올림픽)가 참석했다. 그는 유감스럽게도 엄청난 피부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부인은 경건한 자매였고 나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나는 메시지를 다 전한 후 그 선수에게 안수하며 기도를 해 주었다. 그의 팔과 온 몸은 다 헐었으며 불그스름한 반점이 가득하였다. 그는 아무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해도 낫지를 않는다고 하면서 기도를 요청해온 것이다. 나는 그 길로 귀국길에 올라 돌아왔는데 그 후 2006년도에 다시 방문했을 때 그 선수의 아내에게서 그때 안수 받고 돌아가서는 이내 피부병이 나았다는 간증을 들었으며 남편이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 아내는 그 후 플로브디프 지역에서 귀하게 섬기는 자매가 되었다.
자나와 가립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불가리아의 많은 일들을 거의 책임지고 있는 부부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태리의 상황을 위해 불가리아를 두고 나폴리로 떠났다. 그들은 엔조의 아파트 1층의 예배 장소로 구입해 놓은 처소에서 먹고 자면서 그들과 항상 함께 했다. 간지 얼마 안돼 내가 불가리아 선교를 책임지고 일하는 요안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자나와 가립은 어떻게 이태리 형제들과 대화를 하고 통하느냐? 요안나는 나에게 힘도 안들이고 대답했다. “방언의 은사를 받았나 봐요! 이태리 말을 아주 잘 한대요!”
나는 금방 이태리로 떠난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그 나라 언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2006년 이태리에 다시 가서야 자나와 가립이 이태리어를 구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의 힘은 무섭고 놀랍다. 자나와 가립은 그만큼 이태리 성도들을 사랑한 것이다. 나는 저들의 헌신과 수고를 주님이 기억해주시리라 믿는다. 이들은 2007년 현재 한국에 우리와 함께 머물고 있으며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
요안나 선교사에 대하여
▲벨리 시내에서 이태리 사람들과 함께. 드디어 컬러사진도 등장했다. 중간에 있는 한국 사람이 요안나 선교사다.
2006년 여름 어느 날 요안나가 나에게 말했다. “이태리를 가서 이태리어를 배워야 할 것 같은 감동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사역이 약화되는 것은 그 나라의 통역자가 없을 때 현저하다. 우리는 이태리어를 할 수 있는 동역자들이 7-8명 있었지만 거의 다 잃어버린 상태이므로 어떻게든 통하기가 어렵고, 여기저기서 이태리 교회를 어지럽히기 위한 사탄의 공격은 만만치 않았으며, 우리는 이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던 터였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즉시 주님의 인도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매의 충성됨에 감동이 됐다. 그녀는 이미 어린 두 아이의 어미이고 그 중 한 아이는 소아당뇨를 앓고 있으므로 항상 옆에서 엄마가 챙겨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아이들을 어떻게 하구?” 요안나는 즉시 대답했다. “다 두고 가든지 둘 다 데리고 가든지. 하나만 데리고 가든지 해야죠!”
그 후 요안나는 한국의 이태리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한두 달 속성과정을 끝냈다. 그런 다음 어느 날 나와 요안나의 남편 정희근 선교사와 요안나가 자리를 같이했다. 그때 요안나는 이태리로 가는 일에 대해 약간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들이며 여러 상황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태리에 가면 적당하게 머물 수 있는 집이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지낼 것인가? 아이는 누가 돌볼 것인가? 꼭 가야만 하는 것인가? 많은 생각이 교차한 것이다.
나는 먼저 남편인 정 선교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희근 선교사는 자기 아내인 요안나가 이태리에 가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지금 그곳에 가지 않으면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주의 일에 힘이 빠지는 일이다. 반드시 가야한다”고 말했다. 요안나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만일 내가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면 편안한 마음으로 가지 않으려는 얼굴이었다. 나는 간단하게 말했다. “원래 결정한대로, 남편이 말한 대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요안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그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았다. 그리고 얼마 후 요안나는 짐을 챙겨서 두 아이를 데리고 이태리로 떠났다. 이때는 2006년 10월이었다.
공로상 7인과 조현삼 목사 수여
앨범·워십·CCM 부문별 시상도
2년간 발표된 2,396곡에서 엄선
한국기독음악협회(회장 안민·송정미, 이하 K-CCM)에서 주관한 ‘2024 K-CCM 어워즈(AWARDS)’가 처음으로 지난 11월 25일 서울 용산구 삼일교회(담임 송태근 목사)에서 개최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