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에 대한 바른 이해

류재광 기자  jgryoo@chtoday.co.kr   |  

한복협 2월 월례회 김영한 박사 강연 전문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 이하 한복협)는 13일(금) 오전 7시 새문안교회(담임 이수영 목사)에서 "나사렛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2월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를 가졌다. 다음은 김영한 박사(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 한복협 신학위원장)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바른 이해’ 응답 전문.

▲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한복협 신학위원장)

▲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한복협 신학위원장)

머리말

2007년 7월 SBS의 방송 『신의 길과 인간의 길』이란 제목으로 3차례 방영한 다큐멘터리는 역사적 예수를 하나의 신화적 인물로 간주하여 한국의 기독교와 사회에 적지 않는 해악을 끼쳤다. 이 방송은 2002년 동아일보가 번역 출판한 『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 라는 책에 근거하여 이것을 영상으로 그럴 듯하게 편집 제작한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역사적 기독교가 출발한 역사적 실재이다. 그분의 처녀 출생, 메시아적 삶,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승천 없이는 오늘날의 기독교는 없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요청된다.

1.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의 조건

역사적 인물에 관한 진정한 이해란 객관적인 자료의 조사만으로는 실제 모습에 도달할 수 없다. 단순한 자료의 분석만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과의 인격적인 교감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독일의 삶의 해석학자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는 설명과 이해를 구분하였다. 설명(Erklaren)이란 자료를 가지고 외면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 것이다. 설명을 통하여는 역사적 사실의 외면성에만 접근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의 내면성에 도달하기 위하여는 이해를 통하여야 한다. 이해(Verstehen)란 체험적인 연관을 형성, 즉 공감을 형성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해를 통하여 역사적 사실의 보다 깊은 내면적 연관성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하나의 역사적 인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인격적인 교감이 필요하다. 한 인물을 이해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그 인물과 같이 생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공동생활을 통하여 하나의 인지적 차원만이 아니라 심정적 차원에서 한 인물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역사적 예수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역사적 자료만으로 한계가 있다.

첫째, 그 자료가 신빙성 있는 자료여야 한다. 역사적 예수를 영지주의로 왜곡한 낙 함마디 문서(도마 복음서 등)등은 올바른 성경적 예수를 이해하는 데 방해물이 될 뿐 아니라 진정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영지(靈知)의 인물로 왜곡시킨다. 오늘날 역사적 예수를 가장 신빙성 있게 전해주는 자료는 사복음서와 사도들의 서신들이다.

둘째,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단지 지성적 이해만으로는 역사적 예수의 진정한 모습에 도달하지 못한다. 역사적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분의 본성이 유일하고 독특하기 때문에 단지 자연적인 측면에서만 접근해서는 그 분이 지닌 초자연적 측면을 놓치기 때문이다. 19세기 서구의 하르낙, 리츨, 헤르만, 슈바이처를 비롯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예수론이 바로 예수를 문화적인 측면에서만 이해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역사적 예수는 하나의 인간적인 모습, 종교적이고, 윤리적이고, 묵시록적 세계관의 인물로 나타났다.

2. 역사적 연구의 한계

고고학적 연구만으로는 우리는 단지 외형적으로만 예수의 역사성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나사렛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가지는 것은 단지 고고학적 연구와는 별개다. 예수 인격에 대한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이루어진다. 4세기 지성인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심취하여 정신적으로 방황하다가 밀라노의 감독인 암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이 당시 어거스틴은 밀라노의 정원에서 영적 고민에 사로잡혀 있다가 “가져서 읽어라”라는 아이들의 동요에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는 자기 서재에 들어가 읽고 있던 성경 로마서 13장 13절을 읽고, 깊은 내면의 변화를 체험하기에 이른다. 그전 1세기에는 기독교를 박해하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천래의 음성을 듣는다. 그는 타고 있던 말에서 떨어져 며칠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신체적 충격을 동반하는 영적 경험을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 아나니아를 만나 안수를 받고 눈멈을 치유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예수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만으로는 신앙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여기에는 신앙적 결단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예수에 관해 질문하면서 신앙의 그리스도를 말하게 되는 이유이다. 신앙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이요, 쿨만이 말한 바와 같이 시간의 중심이요, 세계사의 정점이라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3. 나사렛 예수의 두 가지 측면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은 두 가지 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역사적인 측면의 실재, 다른 하나는 신앙의 측면에서 드러나는 실재이다. 역사적 측면에서 보이는 나사렛 예수는 역사적 예수라고 한다. 이것은 알버트 슈바이처를 비롯한 19세기 신약학자들이 탐구하기를 시도했던 대상이었다. 신앙의 측면에서 보여지는 나사렛 예수는 신앙의 그리스도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를 따르고 신앙을 가지고 고백했던 초대교회가 가졌고 오늘날 기독교회가 고백하는 예수상이다. 역사적 예수는 과거 2천년 전에 계셨던 과거의 인물을 말한다면, 신앙의 그리스도는 초대교회와 그를 믿는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믿는 신앙의 대상이신 현재의 인격을 말한다. 역사적 예수가 과거에 살았고 역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던 예수라면, 신앙의 그리스도는 오늘날 기독교회와 신자들에게 신앙고백의 대상으로 영향을 끼치는 살아있는 예수이다. 그리고 역사의 미래에는 앞으로 오실 재림의 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이다.

1)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는 주후 30년 경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전파와 더불어 공적 생애를 시작하였다. 그는 3년간의 복음 전파의 공생애를 사시다가, 당시 유대교 지도자와 로마 총독에 의하여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유대교 지도자는 그가 “모세의 율법을 훼손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한다”하여 그를 신성모독죄로 고발하였다. 로마총독부는 병자를 고치고 기적을 행함으로써 수천명의 무리들이 따르는 그를 치안 소란범으로 간주하였다. 빌라도 총독은 특히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예수를 당시 로마황제의 통치를 부정하는 반체제 인물로 몰아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하였다. 세상의 자료들은 여기까지만 확실하다. 그 이상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복음서는 우리에게 그 실재적인 진실을 알려준다.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은 이 역사적 예수의 진실이 바로 역사의 의미요 목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들은 자료들을 모으고 편집하여 네 복음서를 저술한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역사적 예수의 진정한 역사성과 진실을 우리들에게 알려준 자들이다. 네 복음서는 한결같이 증언한다: 역사적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고 난 뒤 살아나셨다. 그리고 그 역사적 흔적으로 빈 무덤이 있다. 유대교를 비롯한 당시의 관원들은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스승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소문을 내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는 승천하셨고 하나님 우편에서 왕으로서 세상을 통치하시고 앞으로 재림하실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2) 영지주의 이단에 대하여 요한복음은 육신이 된 하나님 강조

『예수는 신화다』 공동저자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가 속하고 있는 영지주의 종파는 사도 요한이 살았던 1세기의 종파로서 영의 그리스도를 육신의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킨다. 이들은 플라톤의 이원론 철학의 영향을 받아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였다. 그리하여 정신은 선한 것이나 육신을 포함하여 물질은 썩는 것으로 간주하고 종교적으로 쓸모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이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육신과 피를 가진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정한 그리스도는 순수 영적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의 주장은 신적 본질의 이념이 아바타(avatar, 화신)를 통해서 계시되고 있다는 오늘날 힌두교의 가르침과 유사한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하여 초대교회는 이러한 주장을 한 종파의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경고하고 있다;“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온 것을 부인하는 영마다 적그리스도의 영이다”(요일 4:2-3)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영지주의의 주장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태초부터 계신 말씀,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요1:14)고 증언하고 있다

4. 인식의 관점(신앙)이 중요하다.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데도 탐구자의 태도, 즉 인식의 관심이 중요하다. 이 태도는 탐구하는 자의 인식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동일한 예수 부활 사건에 관하여도 초대교회 종교 지도자들은 제자들이 환상을 보았다거나, 빈무덤에 관련하여 제자들이 스승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식으로, 자신들이 가진 고정관념에 따라서 사실을 왜곡하였다. 프리크나 갠디 등 영지주의자들은 신약의 복음서가 보도하고 있는 역사적 예수의 진실에 관하여 그것을 이방 종교의 신화에서 각색한 것으로 왜곡하였다. 청년 사울조차도 다메섹 도상에서 영적 체험 이전에는 예수를 하나의 유대의 율법을 무너뜨리는 신흥종교의 교주로 보았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영적 만남을 통해서 바울은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것이다. 인식의 관심이란 탐구하는 자의 태도이며 이것은 바로 신앙과 연결된다. 신앙 없이 아무리 역사적 자료를 들여다 보아도 예수는 단지 “현자”, “기적을 행하는 자,” “반체제 인물,” “열락을 좋아하는 자” 등의 인간적인 평가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가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라는 인식에는 도달할 수 없다. 이러한 인식은 신앙에 의해서는 가능하다.

5. 신앙의 그리스도

신앙의 눈을 가진 사람은 역사적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태초의 말씀”으로 본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예수의 12 제자들은 “랍비”(선생님)라고 부르면서 예수를 따랐다. 예수는 당시 변두리요 소외지역이었던 갈릴리에서 그의 복음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설교하셨다. 그리고 수많은 앉은뱅이와 귀머거리 등 불치병자들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고쳐주셨다. 가이샤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다. 이에 그의 수제자인 베드르가 예수님에 대하여 신앙고백을 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눅 9:20). 예수님은 이 베드로 고백을 시인하시고, 그가 메시아인 것을 드러내지 말라고 말하신다. 이것이 “메시아의 비밀”(Messianic secret)이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메시아임을 드러내지 말고 한 것은 자유주의 해석가들이 말하는 바 메시아적 자의식이 결여된 증거가 아니라 천국의 비밀이며, 십자가의 비밀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에게 숨겨지고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자에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천국은 마음이 교만한 자의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자의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만류한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미숙한 신앙을 보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했으나 예수를 영광의 메시아로만 이해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자신은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오는 영광의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종교지도자인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하여 고발을 당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의 메시아였다. 이 고난의 메시아는 당시 유대인들에게나 종교지도자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메시아의 비밀이다.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나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음으로써 그의 일은 끝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예수는 돌무덤에 장사된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간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신다. 예수는 감람산에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신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세계를 통치하시고,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죄사함을 주신다. 예수는 마지막 종말 때 재림하시고,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 땅 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기독교회와 신자들은 그분이 재림하기를 기다린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그리스도이다.

6. 역사적 예수가 바로 신앙의 그리스도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는 서로 다른 인물이 아니다. 역사적 예수는 하나의 역사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 오신 역사적인 인물인 나사렛 예수를 가리킨다. 이에 반하여 신앙의 그리스도는 이러한 역사적 예수 안에 있는 나사렛 예수의 진정한 모습을 가르키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에 관하여 단지 역사적 문서만을 가지고 그를 연구한다면, 별 신통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19세기의 신약학자인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그를 묵시록적 세계종말의 세계관에 지배된 매우 성격이 우울한 그 시대와는 격리된 인물로 묘사했다. 이와는 반대로 프랑스의 인문주의자 르낭(Ernst Renan)은 나사렛 예수를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피는 백화꽃를 보라” 등 자연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한 달콤한 인간애주의자로 묘사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 독일의 신약학자 붙트만(R. Bultmann)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분리하였다: “주님은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요, 선포된 분이다” 이에 대하여 불트만의 제자들은 반기를 들었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가 별개의 인물이라면 독일의 신약학자 케제만(E. K?semann), 본캄(G. Bornkamm) 등이 말하는 바같이 기독교 신앙은 역사 없는 공중누각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불트만의 제자들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독일 조직신학자 마르틴 캘러(Martin K?hler)는 “소위 역사적 예수는 선포된 그리스도”라고 말하였다. 오늘날 영국의 신약학자 브루스(F. F. Bruce). 독일 신약학자 헹엘(Martin Hengel), 베처(Otto Betz) 등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는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7. 역사적 시각과 신앙적 시각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신앙을 떠나서 역사적 예수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없다. 신앙 없이는 단지 육신을 쓰고 나타나신 예수의 다양한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탐구자의 선이해에 따라서 각기 다른 렌즈로 역사적 예수를 그려 내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가 결국 실패로 끝난 이유는 신앙적 접근없이 단지 역사비판적 과학적인 시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 학자들에게 들어오는 것은 당시 시대문화에 생소한 반응을 보인 시대착란증에 걸린 예수(알버트 슈바이쳐), 자연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한 휴머니스트(에른스트 르낭), 복음서의 예수는 역사적 예수와는 다른 신앙고백의 산물(불트만) 등이었다.

역사적인 시각과 신앙적 시각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역사적 예수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신앙의 눈은 반대로 역사적 논구를 등한시해서는 안된다. 역사적 논구에 들어오지 않는 예수는 육신을 쓰고 이 세상에 오신 역사적 예수가 아닌 신비스러운 영의 예수, 영지적 예수이었다. 이러한 예수가 바로 이단이라는 사실을 초대교회 예수의 제자 사도 요한은 경고한 것이다.

8. 성령론적 이해 : 해석의 영인 성령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앙의 이해란 성령의 조명을 받는 이해이다. 요한은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 진리의 영을 보내주신다는 예수의 약속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진리의 영은 신자에게 진리이신 역사적 예수를 알도록 인도하신다. 예수는 다음같이 말씀하신다:“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 속에 내주하시면서 진리, 특히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알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성령은 해석하시는 영이다. 역사적 예수는 이미 지상에서 떠나 계시나 그 분이 보내신 성령이 신자의 마음 속에, 공동체 안에 계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에수에 대한 성령론적 이해이다.

맺음말

오늘날 우리는 4복음서를 통하여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바르게 알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추구했던 순수 객관적인 사실적 예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는 그런 분이 아니다. 예수는 처음부터 우리의 구세주로 탄생했으며, 메시아적 삶이 그 분의 본성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장사된지 3일 만에 부활하시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드리시고 온 인류에게 영원한 구세주가 되셨다. 나사렛 예수는 오늘도 그 분이 보내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계신다. 오늘날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하여 그 분과 교통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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