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교수]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 (28)
복음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에 논쟁이 자주 있게 되는 것을 보게된다. 왜 그런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다른 종파보다는 바리새인 종파의 가르침과 공통점이 많았기(Paul Winter, On Trial of Jesus, Berlin: de Gruyter, 1961, 120) 때문이다. 동시대의 종교권력가들이었던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았고, 율법을 준행하고자 하는 열심이 없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믿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와 선지자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자 하는 자들이었다. 예수도 모세와 선지자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그것들의 정신을 바르게 구현하고자 하신 것이다.
따라서 유대교의 전통을 경시하는 자유주의 유대교보다는 그것을 보존하고자 하는 보수주의 유대교가 역사적 예수와 공통점이 많았던 것이다. 예수나 바리새인들은 모두 안식일 규례와 정결법을 존중하였으나 그것들을 이행하는 방식이 달랐다. 예수는 내면성을, 바리새인들은 외면성에 치중하였다. 예수는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가르치시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에 얽매어 율법의 정신을 놓쳤다. 그래서 논쟁이 자주 일어난 것이다. 논쟁은 주로 안식일 준수와 정결법에 관련된 것이었다. 역사적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열거될 수 있다.
I. 공통점
구약의 율법을 믿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믿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윤리적 조항을 지키려고 애썼다. 예수도 마찬가지로 유대의 경전을 읽었고, 구약을 소중하게 여겼다. 예수 자신이 유대인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회당에서 유대교가 기반하고 있는 구약의 성경을 열심히 읽었다. 바리새인들은 613조문으로 된 계명과 규례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겼다. 그중에서도 365조문은 소극적인 것이고 245조문은 적극적인 것 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이 조문이 율법 종교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바리새 정통주의자들은 이 조문(條文)만이 진리라고 보았다. 그래서 613조문에 몇 조문을 첨부한다거나 빼는 것은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예수는 이단자로 취급된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예수도 구약성경을 믿었다. 예수는 성경을 폐할 수 없으며, 율법은 일점 일획도 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복음서 저자 마가는 바리새인이 예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것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막 2:18). 예수 자신은 금식을 부정하지 아니하시며 이르신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막 2:19-20). 유대인들은 회개와 속죄를 수행하기 위하여 금식하였고,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도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였다(눅 18:12). 그러나 메시아이신 예수가 계신 중에는 제자들은 잔치의 주인공 신랑과 같이 있기 때문에 속죄일에 행하던 금식 자체가 불필요하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중에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기념일인 성 금요일에는 금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과 기적을 믿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를 고치신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병자를 고치는 예수의 기적을 보고 예수가 자기들 종교를 위협한다고 생각하였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예수께서 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치신 일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는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요 9:6)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9:7)하시고 소경을 치유하신다. 이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치유받았다는 소경의 말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에게 이 사람이 정말 소경으로 태어났는지를 묻고 소경에게 이른다: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요 9:24).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을 보고 당황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는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기적을 일으킨 예수가 자기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로 간주하였다.
부활과 내세를 믿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았으나(마22:23-28) 바리새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정통파였다. 예수는 유대교가 증거한 부활신앙에 근거하여 종말에 일어날 두가지 부활에 관하여 설교하신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예수는 단지 죽은 모든 자가 부활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들이 생명의 부활이나 심판의 부활에 직면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니고데모는 진실한 바리새인이었다
니고데모는 예루살렘의 공회의 일원이었다. 이 공회 안에서 그는 서기관 집단에 속한 인사(人士)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를 “이스라엘의 선생”(요3:10)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서기관들은 대다수가 바리새파 출신이었다. 니고데모와 그의 많은 동료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보내신 선생(랍비)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가 행하신 표적들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여 밤에 예수께 와서 그의 신앙을 고백한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도리를 가르치시고 그날 밤 그는 변화받은 사람이 되어 돌아간다.
II. 차이점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규례를 철저히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너무나도 율법의 의례적인 규례에 얽매였다. 그리하여 율법의 정신을 놓쳤다. 이들은 율법의 규례를 외면적으로 지키고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에 위선이 심했다. 이들이 역사적 예수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논쟁거리는 안식일 준수와 정결법 규례에 대한 준수에서 나타났다. 역사적 예수는 바리새인의 이러한 외면성에 치우친 허례와 허식을 지적하시고 이것이 위선이라고 비판하셨다.
바리새인의 위선을 드러내셨다
수만 명의 무리가 모인 장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눅 12:1)고 경고하신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눅 12:2). 마태복음 23장에는 특히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외식(外飾)을 질책하는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2-7). 예수는 가장 심한 어조로 질책하신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그리고 예수는 이들 전통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선지자와 지혜자를 박해한 것을 질책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마 23:34). 예수는 의로운 이들을 죽인 피값이 이들 유대인들에게 돌아갈 것을 예언하신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마 23:35-36).
바리새적 외면 종교에 대하여 진정한 마음의 종교를 보여주셨다
예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마음이 탐욕과 방탕으로 차 있는 것을 지적하신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이들에게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고 명하신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26). 예수는 이들의 외면성의 경건은 속으로는 무덤에 불과하다고 꾸짖어신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28).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경건성은 그 내면에 송장이 들어 있고 외면만 번지르르한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난하셨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정신을 상실하였다고 말씀하신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 11:42). 예수는 율법의 정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는 십일조를 부인하지 아니하신다. 십일조를 드리되 그 정신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버리지 말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안식일 정신을 위하여 안식일 법을 깨뜨리신다
바리새인들은 병 고치는 것 자체를 트집잡지 아니했다. 단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친 일 때문에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하였다: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요 5:16). 이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하신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여기서도 예수는 안식일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안식일에도 하나님은 우주를 섭리하기 위하여 쉼 없이 일하신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예수는 아버지를 따라서 소경의 문을 뜨게 하는 선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정결법의 정신을 위하여 정결규례를 깨뜨리셨다
정결법에 관하여 예수는 정결법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정결의 원리를 말씀하신다: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고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다”(눅 11:42). 예수는 정결법의 정신인 내면의 정결을 가르치신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눅 11:39-41). 예수는 정결의 규례에만 치중하여 속으로는 탐욕이 가득하면서 외면적으로 깨끗한 체하는 외식자(外飾者)들을 나무라시면서 내면의 청결을 강조하신다.
죄 용서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지붕을 뚫고 내려진 중풍병자에 대하여 “소자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병은 원칙적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치유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속으로 비난한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 여기서 역사적 예수는 죄 용서를 선언하심으로 모세 이상의 권위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리새인들에게는 걸림돌(skandalon)이 된 것이다.
사랑의 계명을 주셨다
예수는 모세 율법과 선지자 예언의 강령은 사랑의 계명이라고 가르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예수는 모세와 선지자의 전통에 얽매어 있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이 두 가지 전통의 핵심인 사랑의 새로운 계명을 선포하심으로써 이들의 종교를 완성하시고자 하였다.
III. 외면종교와 내면종교
구약의 율법은 신성한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이 지켜야할 법규를 제시해준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등은 모든 시대에 있어서 모든 인간이 지켜야할 규범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유대인들은 이 법규를 외면적으로만 지키기에 열중하고 그 내면성을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그 마음에는 살인하는 마음이 있고, 음란한 마음이 가득하고, 거짓말하는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적으로 그것을 나타내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율법적으로는 흠이 없는 자로 간주되었다. 그 내면은 아주 부패했음도 불구하고 그렇게 간주되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 예수는 외식과 불법으로 가득찬 율법종교의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러한 외면종교에 대하여 경건의 내면성을 주장하신다. 율법은 그 나타난 결과를 중요시했으나 예수는 그 내면과 동기를 보신다. 그리하여 내면종교에서는 이미 동기가 잘못되어 있으면 율법을 범한 것으로 간주되고 율법주의자의 경건과 외식(外飾)은 허물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율법 자체는 신성하다고 보았다. 이런 면에서는 예수는 율법폐기주의자(antinominian)도 아니었고, 전통을 무시하고 폐기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해체주의자(deconstructivist)도 아니었다. 예수는 율법의 내면성을 중요시한 점에서 율법을 오히려 그 정신에 있어서 살리신 것이다.
예수는 성령을 보내시어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 속에 쓰시고 자발적으로 지킬 수 있도록 약속하셨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5-26). 이러한 내면성을 새롭게 하시는 약속은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시는 에스겔의 예언 속에 이미 나타나 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5-26). 오늘도 예수는 그 약속하신대로 보혜사 성령을 신자들 마음 속에 보내어 주셔서 우리 속에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고,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 자벌적으로 하나님의 규례를 행하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