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남 목사의 목양수필 ‘그분과 함께’(1)
“오늘은 결혼기념일! 십 년 넘게 함께 살다보니 이젠 아내조차도 무심코 지나가게 되는 날! 언제부터인가 결혼기념일을 제가 챙기게 되었습니다. 워낙 무드가 없고, 힘겨운 전도사며 부교역자 생활에 늦깎이로 유학까지 한다고 나선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운 일이고 부담스럽게 느껴졌나 봅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지나가는 결혼 기념일을 저라도 챙겨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야 워낙 사회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어줍잖게 분기를 잡아도 가계에 무리가 많았고, 또 별다르게 챙길 여유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곳 시드니에서야 마음만 먹으면 지천에 널린 게 공원이고, 국제 수준의 관광지이다 보니 짧은 주머니든, 학위 공부한다고 여유가 없든 간에, 그건 마음먹기 달린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요번에는 ‘어떻게 깜짝 파티를 해서 우리가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맺어지고 또 이제까지 살아온 날들을 기념할까?’를 생각하며 옛날 앨범을 뒤적였지요. 강신이 한 번 하고도 반쯤 지난 까마득한 옛일처럼 그날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시작하였던 결혼 12주년 기념수필이 이제 다시 거기에 12년이란 세월을 더 보태어 제2탄을 쓰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니 점점 더 영악해지고, 이것 저것 더 많이 생각하는 눈치만 늘어가는 것 같아 마음이 죄스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전에는 결혼기념일을 챙기고 조그만 선물을 사는 일 등이 즐거웠지만, 요즘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 주변에 배우자 문제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꽤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가 자부심으로 챙기던 결혼기념일 행사도 슬그머니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다 커버린 아이들이 아빠의 결혼기념일을 챙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아예 시골 외딴 곳에 숙소를 아이들이 예약해 놓고는 옷가지 챙겨 등 떠밀려 나오게 되었습니다.
꽉 짜여진 스케줄 속에서 마치 톱니바퀴의 한 부품으로 살던 일상을 떠나 한적한 야외로 나오니 참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호주 시골의 이름 모르는 들플들도 참으로 아름다웠고, 밤길을 운전하다 치일 뻔 하게 아슬아슬하게 내 차 앞에서 하이빔의 조명을 받으며 서 있었던 품위있게 생긴 금발의 야생 여우 녀석을 감상한 것도 소득이었지요. 주일 심방을 마쳐놓고 늦게 출발하여 밤 늦게 도착하다 보니 체크 아웃하고 나올 때까지 그 숙소집 주인과 눈 인사도 못하고 나온 해프닝이며, 써던 하이랜드의 숲에 숨어있는 여러 가지 폭포들을 감상하는 것도 운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약간은 쌀쌀하고 잘 익은 호주의 늦가을 바람을 맞으며 아내랑 숲 속에 난 오솔길을 걷고, 노래도 부르며 산책을 하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지 아득하기만 했습니다. 원래 ‘내가 그렇게 무드없는 친구였는지?’ 아니면, ‘호주 이민 목회가 나를 그렇게 여유없는 사람으로 몰아갔는지?’ 아니면 ‘아염없이 늙어가는 나이 탓인지?’ 모르지만 최근 한 몇 년 동안은 그런 시간을 못 가져보았나 봅니다.
핏즈로이 폴(폭포) 주변의 산책로를 좀 더 걷자는 아내의 체력을(?) 감당할 수 없어 속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철수를 하면서도 아내는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해했습니다. 한적하고 잘 정리된 호주의 시골 길은 그야말로 드라이브하기 좋은 코스였습니다. 널찍하게들 자리잡고 잘 정리된 정원을 가진 호주의 시골 집들은 아마 꽤 자리잡힌 부자들이 사는 집이려니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결혼 24주년을 보내면서 부부란 무엇이고, 가정이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얼마를 더 살다보면 환갑이 오고, 칠순이 가고 할 인생이란 것을 다시 생각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를 불러 이곳에 있게 하신 그분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월이란 놈은 가만히 있는데 내가 그 세월이란 녀석 옆을 열심히 지나가는지, 아니면 나는 그냥 서 있고 세월이란 녀석이 나를 스쳐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나그네 세월 지나가는 동안 이제는 좀 여유있고, 좀 넉넉한 마음으로 내 삶의 한 편린이 되어 엮여져 가고 있는 내 주변에 함께 있는 생명들을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일에 함께 부름받아 힘들어도 내 곁에 든든한 후원자며, 응원자로 이 시간까지 나와 함께 있어준 아내가 새삼 소중한 동지임을 고백합니다.
그간 조그만 이민교회 섬기는 못난 신랑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 많이 했을까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뜻해지기도 했지만 냉큼 모른 체했지요. 저는 참 이렇게 늦게 철이 드는 스타일인 모양입니다. 아침에 먼저 일어나 엊저녁 먹다 남은 스펀지 케익 한 조각과 사과 하나를 깎고, 오렌지 주스 한 컵으로 손수 결혼 24주년 기념 조찬이란 걸 차려놓고는 아내를 깨워 초대했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습니다. “숙아, 그동안 고생 많았제?”, “나도 니 땜시 고생 많이 한 거 알제?” 물론 뒷 말은 속으로만 했지만……. 그렇게 늙어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12년 전의 고백은 지금도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옹다옹, 티격태격 아니 다툰 그런 부부는 아닐지라도 우린 함께 울 줄 알던 그런 삶을 주님 안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사랑스런 아이가 셋, 재산은 없고, 얼마간의 책과 그릇과 옷가지 조금. 그리고는 익어가는 시드니의 봄처럼 우리의 덜 떨어진 가슴 속에 주님 사랑 한 아름. 이것이 십 년하고도 몇 년을 더 살아온 부부의 손익 계산서라면 어떨까요? 그날 그 십 몇 년 전과 무엇이 바뀌었을까? 그날 나는 재산 없음. 부양가족 없음. 몇 권의 책과 자취용 취사도구 몇 점, 그리고 교회의 전도사라는 불같은 가슴만 있었죠.
‘그러고 보니 외형적으로 별로 늘어난 것도 없고, 손해 본 것은 더더욱 없지 않는가. 그럼 내가 제법 괜찮게 살아왔단 말인가? 아니지, 그때는 없었던 아내를 얻었고 덤으로 사랑스런 세 아이를 얻었으니 손익계산서로만 말하자면 나는 분명히 흑자야, 흑자…….’ 하며, 나만의 이상한 계산법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결혼기념일인데도 잃어버린 목걸이를 못내 아쉬워하던 아내에게 구루마제라도 하나 걸어줄 걸 그랬다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친구들처럼 좋은 집 사고, 그럴듯한 자가용 빼고, 좋은 옷 입게 호사스럽게 살진 못해도 이렇게 마음의 시간을 내어 바다가 보이는 호젓한 카페에 마주보고 앉아 눈빛으로 애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 하는 아내를 주신 주님께 감사, 올해의 결혼 기념일, ‘미션 파스블(Mission possible)’이었습니다.”(12주년 수필에서)
결혼 24주년! 여전히 재산은 없고, 얼마간의 책과 이곳 저곳에서 얻어다 놓은 살림살이 조금, 여전히 셋방에서 살지만, 다 커서 제 몫 이상을 하는 사랑스런 내 생명의 분신 같은 아이들 셋, 거기다, 이제는 내 가족일 뿐 아니라 내 생명 같은 샬롬교회라는 커다란 믿음의 열매까지 함께 있어 갑절의 행복으로 행복해할 수 있는 결혼 24주년을 인해 그분을 찬양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제는 다 커 버린 아이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는 아빠와 남편이 되어 살아야겠는데 그게, 내 힘으로는 안되는 일 아니겠어요?
주님께 기도합니다. “이제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주님, 남은 시간들도 내 삶에 은혜로 함께 하옵소서. 주님, 갑절로 주신 행복만큼이나 넉넉한 여유와 사랑으로 당신의 생명들을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올해의 기념일에는 내 마음에 끼인 많은 삶의 생채기들과 찌꺼기들을 씻어 내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비가 많이 내리네요. 하염없이, 하염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