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절대 강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법

김은애 기자  eakim@chtoday.co.kr   |  

▲ 최요한 목사(남서울비전교회).

▲ 최요한 목사(남서울비전교회).

스 7:27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스 7:28 또 나로 왕과 그 모사들의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나의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두목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

어느 날, 한경직 목사님이 교회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시기에 성경을 읽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을 꿨다고 합니다. 그런데 꿈 속에 사람 손의 10배나 되는 큰 손이 나타나더니 자신이 앞으로 넘어지려고 하면 앞에서 붙잡아 주고, 뒤로 넘어지려고 하면, 뒤에서 붙잡아 주면서 쓰러지지 않도록 자신을 붙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그 꿈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봤더니, 자기가 펴 놓은 성경에서 에스라 7장 9절이 눈에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에스라 7:9)”

이 말씀은 에스라가 바벨론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한경직 목사님이 그 꿈을 생각하면서 목회의 힘든 고비를 넘기고 오늘의 서울영락교회를 이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먼 길을 가는 동안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나타나셔서 그 큰 손으로 붙들어서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자들을 언제나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에스라가 그것을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에스라는 모세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에스라의 초상화가 그려져야 합니다.

우선, 에스라는 계시를 경전화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 전했지만, 에스라는 모세의 경전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하나의 책으로 묶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약에 바울이 있었다면, 구약에는 에스라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음으로 에스라는 매주 강론을 시작했습니다. 체계적으로 정리한 그 경전으로 매주 회당에서 가르치는 것을 처음 시작한 인물입니다. 사실 에스라 이전에는 설교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에스라 이전 시대, 선지자 시대나 모세 시대나 족장 시대나 거슬러 올라가면 에스라처럼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기록된 말씀을 먼저 선포하고 가르치는 이런 식의 종교행위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설교라는 것을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 안에 가지고 온 사람이 에스라입니다.

끝으로, 에스라는 헤브라이즘(Hebraism)의 창시자입니다. 또 한 가지, 에스라는 세계 사상사에도 매우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한 인물입니다. 세계 사상사를 보면 두 기둥이 있는 데 하나는 헬레니즘(Hellenism)이고, 다른 하나는 헤브라이즘입니다. 그런데 헤브라이즘의 창시자가 바로 에스라입니다. 인류 문화에 중요한 사상의 축을 가져온 인물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위대한 인물입니까? 그래서 에스라의 삶 안에서 이루었던 업적은 감히 모세와 버금갈 정도라고 해도 지나치지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귀환해서 신앙부흥운동을 일으켜 죽어가던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시킵니다. 에스라가 이처럼 부흥의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에스라 7장 6절을 보면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더니(에스라 7:6)” 에스라는 말씀대로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은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하나님께서 에스라와 함께 하셨으므로 아닥사스다(Artaxerxes)왕에게 구하는 것을 다 받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바사 제국은 고레스 왕 때부터 식민지 민족의 종교나 문화 정책에 관대했습니다. 원래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점령하게 되면, 식민지 나라의 언어와 문화, 종교를 말살하면서 정복한 나라의 문화로 동화를 시킵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통치방식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됐을 때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내선일체(내선일체)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말과 문화를 없애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기독교를 탄압했습니다.

그런데 바사의 아닥사스다왕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종교정책에 관대했습니다. 아닥사스다왕은 각 지역을 다스릴 때 각 특정 종교의 우두머리를 세워놓고, 그 사람을 통해서 종교적 체계 안에서 통치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에스라는 단순한 종교적 지도자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왕의 대리자였고 종교적으로는 교사였습니다. 그것이 당시 학사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학사란 유대인들이 세운 사람이 아니라, 아닥사스다가 세운 바사의 관리였습니다. 아마 아닥사스다가 볼 때, 에스라는 자기 제국의 일부인 예루살렘을 다스리는데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닥사스다는 통치의 수단으로 에스라를 보내게 되었는데, 에스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에스라는 유대인들을 신앙인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갔습니다. 에스라의 마음속에는 여호와 신앙을 부흥시키려는 신앙적 열정이 충만했던 것입니다. 그런 에스라의 동기가 하나님의 뜻에 딱 맞아서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스라를 도우셔서 하는 일마다 형통케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할 만큼 용감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받지 않고 살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이 40을 넘기고, 50을 넘긴 사람들은 다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야 가정이든, 사업이든, 자기 인생이 잘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흔히 50이 넘으면, 사람은 종교적(Religious)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젊었을 때 내가 할 수 있다(I can do it)는 신념으로 살아가잖아요.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려있고 ‘내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소위 불혹의 나이를 넘기면, 그 때에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그래서 잠언 16장 1절 말씀에 있지 않습니까?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화께로서 나느니라.”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공통적으로 나이가 들면, 인생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자식 농사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됩니다. 남편이 아내 마음대로 안 되고, 아내 역시 남편 마음대로 안 됩니다. 때로는 자기 마음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됩니다. 세상에 실타래 풀리듯 자기 계획대로 잘 풀리는 인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지요. 달콤한 것보다는 쓴 고통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럴 때 어디를 쳐다보느냐? 위를 쳐다보게 됩니다. 그런데 젊었을 때는 그게 잘 안보입니다.

옛 속담에도 있잖아요. 갓 피어난 이삭은 머리 숙이지 않는다고. 벼가 머리를 숙이려면 무거워져야 머리를 숙입니다. 인생을 좀 살고, 나이 드신 분들이 다 그러잖아요. “인생살이가 자기 마음대로 되느냐?”

우리 모두 다 ‘베드로의 아침’의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아침이 무엇입니까? 물고기를 하나도 못 잡고, 해변으로 와서 그물을 거두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고기가 있더냐?” 물어보시잖아요. 그리고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를 많이 잡게 됩니다. 알고 보니까 바다에 물고기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너무 많지요. 깔린 게 고기니까 그래서 성공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행복이 깊은 곳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해야 성공과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해야 성공과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됩니다. 베드로가 그날 아침에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아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에스라를 보면서 주목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언제나 사람을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뭘 받느냐 하면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것은 같이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돕는다는 말은 사람을 통해 나를 돕는다는 말이 됩니다.

저도 북한선교원 수석목사로 있던 시절에 한 권사님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인덕이라는 게 그냥 생기는 게 아닙니다. 본문을 볼 때마다 저는 정말 공감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나를 도우실 때는 사람이 반드시 나를 돕는다는 사실입니다. 정말로 전혀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 나를 돕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 해결이나 회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보면 관념화된, 그리고 습관화된 신앙으로 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와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11장 6절 말씀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는 마음, 그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도우심을 어떻게 받는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할 때 도우심을 받아 형통합니다. 에스라 7장 10절에 보면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했고, 또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실천한 그 말씀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 중에 에스라가 단지 기도 생활 열심히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형통함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 유치한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면, 에스라의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형통케 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했기 때문에 형통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형통은 인생의 목적, 그 자체가 아닙니다. 에스라는 형통하게 사는 것을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에스라는 하는 것마다 잘 되고 성공하고 편안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아니했다는 말씀입니다. 에스라의 형통함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형통을 구할 때, “그래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형통을 구했을 때는 하나님을 향한 뜻이 있어야 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구했을 때는 하나님을 향한 뜻이 있어야 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위한 동기에서 출발해야 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소원에서 출발해야 됩니다. 그래서 에스라의 형통은 여호와 신앙의 부흥을 위하여 그가 형통을 구했고, 순종의 삶을 통해서 형통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다른 한 가지 방법은 금식과 기도를 통해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약 1,500km나 되는 예루살렘 귀환의 멀고도 긴 여정이 평탄하도록 금식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겸손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에스라 8장 21절에 보면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귀환을 앞두고 평탄한 귀향을 위해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도우심의 손길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를 반드시 도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하고 가는 사람에게도 어려움이 있고, 기도 안하고 사는 사람에게도 도전은 있습니다. 문제는 그 결과입니다. 기도 없는 사람에게는 그 끝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귀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금식하고 기도하는 자는 중간에 어려움이 있어도 반드시 종국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이 귀환자들을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셨습니다(8:31).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이라고 하지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금식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금식기도를 “나의 기뻐하는 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서 58장 6절에 보면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해줍니다. 그만큼 금식의 능력은 대단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정한 금식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때를 따라 금식을 했으며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반드시 금식하며 기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40일 금식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출 34:27-28). 에스더는 3일 금식기도로 유대인들을 전멸시키려는 하만의 궤계에서 구원받을 수가 있었습니다(에 4:15-16). 예수께서는 금식과 기도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17:14-21).

정말로 금식기도는 하나님을 제일 영화롭게 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런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금식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축복들을 얻게 하는 방편”이라고 말했습니다. 에스라와 귀환자들이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만큼 더 큰 준비가 없습니다. 기도가 최고의 준비이고, 기도가 기적의 원동력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영국이나 미국, 핀란드 등의 유럽 여러 기독교 국가에서 자기 나라가 큰 국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 앞에 초비상 금식 기도를 한 예가 많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사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아직 소련이나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을 때, 독일군이 프랑스를 기습적으로 점령해 버려서 전쟁에 참여한 영국의 정예 30만 대군이 프랑스의 조그만 항구도시인 던커크에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다에는 독일의 유보트 잠수함이 떠서 오는 배들마다 다 폭파시켜버리고, 공중에는 독일의 최신예 폭격기들이 폭탄을 쏟아대고, 육지에는 독일의 정예 기계화 부대가 영국 30만 대군을 둘러쌌습니다.

영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게 되었습니다. 유럽은 이미 초토화되고 이제 영국만 떨어지면 전 유럽은 완전히 히틀러의 발에 짓밟히게 되고 맙니다. 영국의 30만 대군이 던커크에서 마치 물 마른 연못에 올챙이 모였듯이 모여 있는데 이를 구할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럴 때 영국은 여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처칠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에게 금식하며 기도의 날을 선포했습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모두 다 회사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엎드려 하루 종일 금식하며, 전 국민이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처칠 수상은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성전 성가대석에 꿇어앉아 하루 종일 주님께 울면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내 주먹을 믿으라”고 하는데 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시험과 환란의 바람이 불어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 영국 국민이 어린아이와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여 영국을 구원하소서! 정예 30만 대군을 구원하소서!”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응답이 어떻게 왔습니까? 장마철이 아닌데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것입니다. 바다에는 얼마나 파도가 치는지 독일 잠수함들이 다 철수해 버렸습니다. 비가 장대같이 오니까 공중에는 비행기 한대 뜰 수 없었고, 땅 위의 기계화 부대들은 전차나 자동차가 진흙탕에 빠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 일주일을 비가 쏟아진 후, 던커크 하늘에 구름이 걷히고, 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다는 잠잠해 졌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독일군 쪽에는 비가 계속 억수로 퍼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은 그것을 이용해서 전 영국의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보트까지 다 동원해서 프랑스 던커크에 포위되어 있는 30만 대군뿐만 아니라, 모든 민간인들까지도 다 도버해협을 통해서 영국으로 무사히 후퇴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독일군 쪽의 비가 그쳤습니다. 독일군대가 군사를 정비해서 던커크에 도착해보니 30만 대군은 이미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영국은 그 군대를 재정비해서 북아프리카로 투입시켜 결국은 히틀러를 무찌르고 승리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로 기도가 기적의 원동력이라는 것이 증명된 하나의 사건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에서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기적은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믿음의 기도는 자신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국가를 살리는 것입니다.

민족을 위한 회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대로 살고 금식과 기도하면서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왔을 때, 가증한 일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이방인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는 행위였습니다 에스라에게 충격적인 것은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러한 가증한 일에 더 앞장섰다는 것이고, 심지어 제사장들까지 그랬다는 것입니다(스 9:2). 그래서 에스라는 비통한 마음으로 옷을 찢고 통곡했는데 저녁에 예배할 때에 무릎 끓고,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회개 기도를 합니다.

에스라 9장 6절에,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듯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치니이다.” 에스라는 너무너무 부끄러워 하나님께 얼굴조차 들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이 머리 끝까지 차고 넘치고 허물이 하늘에 까지 미친다고 죄를 고백합니다. 에스라는 비록 자신이 지은 죄가 아니지만, 에스라 10장 1절에서 “하나님의 전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기도 후, 에스라는 총회를 소집하고 강력하게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합니다(스 10:7-11). 에스라 10장 11절과 12절에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여인을 끊어 버리라 회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그러자 백성들이 에스라의 말에 순종의 실천을 결의하여 이방여인들과 자녀들을 다 내어보냅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가 깨끗이 해결됩니다.

에스라 9장과 10장에서 보듯이 귀환한 에스라는 잡혼의 문제를 가장 심각한 죄로 보았습니다. 영적 부흥운동의 성공과 실패는 바로 잡혼의 문제를 해결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에스라는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점은 그 당시 잡혼은 우상숭배와 부도덕의 죄를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방의 여자들이 시집올 때, 그냥 오지 않습니다. 야곱의 아내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시집올 때, 여자들이 섬기는 가신을 가지고 옵니다. 쉽게 말하면 이방여인이 올 때, 우상 신앙이 같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철저하게 신앙의 순결성을 지켜야 하는데, 돌아와서는 거기 있던 이방여인들과 통혼을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이스라엘의 불이 꺼지게 됩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잡혼을 척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21세기의 인권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안 됩니다. 지금 이 상황은 선민의 생존이 걸린 특수한 상황입니다. 귀환한 유다 백성들은 언약 공동체인데, 그 공동체의 존망이 걸린 문제입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도 이방인들과의 결혼을 금지한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들과의 결혼을 개개인의 삶의 위기로 보았습니다.

에스라는 기도를 통해 백성들이 이방의 아내와 자녀들을 내어보내는 신앙적 결단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기적입니다. 우리가 단지 신앙적 이유로 아내를 내보내고, 자녀와의 인연을 끊을 수 있습니까? 인간적으로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진정한 순종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이 기도했기 때문에 그런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그런 믿음을 통해 에스라의 신앙부흥운동은 성공을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말씀을 행하고, 전심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기적은 말씀에 있고, 기도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행하고, 금식과 기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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