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절대강자] 느헤미야의 신앙

김은애 기자  eakim@chtoday.co.kr   |  

▲최요한 목사(남서울비전교회).

▲최요한 목사(남서울비전교회).

느헤이먀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 위로를 받음”이다. 그는 B.C 5세기에 활동한 유대인 지도자로서 페르시아 왕 아르닥사스 1세가 유대인들을 포로에서 풀어준 뒤(B.C. 444경)예루살렘을 재건했다. 또한 폭넓은 도덕 및 의식(儀式)개혁을 감행하여 유대인들로 하여금 야훼에게 다시 헌신하도록 만들었다.

느헤미야 1:4-11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5.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9.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10.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

최근에 가장 각광받고 있는 리더십은 서번트 리더십(Servant-Leadership)입니다. 그런데 이 서번트 리더십의 시작은 미국 최대의 기업 AT & T의 경영교육담당 부사장이었던 로버트 그린리프(Robert K. Greenleaf)가 1960년대 말, 학생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났을 당시 고민의 결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의 서번트 리더십은 헤르만 헤세의 「동방순례」라는 소설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헤세의 이 소설은 신비로운 여행길에 오른 여행단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레오는 여행단의 종으로서 여행단이 지치고 힘들어할 때는 노래를 불러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적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여행단들은 오직 종 레오만 의지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평범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덕분에 여행길은 순조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레오가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일행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고 결국은 여행자체를 포기하고 맙니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레오가 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여행단의 리더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로버트 그린리프는 여기에서 큰 힌트를 얻고 미국이 진정한 세계의 지도적인 국가가 되고자 한다면, 섬기는 리더십인 서번트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릴 느헤미야가 바로 지배자가 아닌 그런 서번트(Servant)형 지도자인데, 시대를 이끌어가는 인물들의 리더십을 보면 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배자형과 지도자형입니다. 지배자형 리더십은 언제나 남을 이기고 그 위에 군림하려는 사람입니다. 정복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남을 이기는 것이 성공인 줄 알고 삽니다.

그러나 지도자형 리더십은 다릅니다. 참된 싸움이 남과의 싸움이 아니고, 자기와의 싸움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언제나 자기와의 싸움에 모든 힘을 다 쏟습니다. 그리고 남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있는지를 끊임없이 탐문하면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느헤미야가 그런 지도자형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느헤미야의 리더로서의 특정이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다른 사람의 불행과 그들의 아픔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등장하는 느헤미야서는 히브리 성경에는 원래 에스라서와 한권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구분하면 1장에서 7장까지는 성벽수축에 관한 내용이고, 8장부터 13장까지는 도덕 개혁입니다.

첫째, 참된 지도자는 하나님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고,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게 B.C. 586년에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B.C. 539년에 바사의 고레스 왕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서 5만 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고국에 돌아갈 수 있도록 귀환 령을 내리게 합니다. 1차 귀환은 스룹바벨론에 의해, 2차 귀환은 에스라에 의해 귀환합니다.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온 후, 이제 10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이 제국을 통치하던 때에 왕국에 느헤미야라는 술관원이 있었습니다.

유다 백성인 느헤미야는 어느 날,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의 형편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들이 전한 소식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동포들이 극심한 환난 가운데에 능욕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이 다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성문은 불에 타서 없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느헤미야 1장 4절에 보면,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멀리 떨어져 있는 고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비참한 상황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성이 훼파되고 예루살렘이 유린당한 그들의 아픔을 마음에 담고 울었습니다. 이것은 인격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차 포로귀환 후, 100년이 지난 상황이었고, 자신은 바사에서 출생해서 바사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지금은 바사 왕궁의 최고급 관리임에도 예루살렘에서 비참하게 사는 동족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이 점에서 탁월했습니다. 당시 역사적 문헌에 보면, 느헤미야는 술 관원이었는데 이 지위는 재상보다 더 높은 최고의 고관입니다.

지금 시대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술관원의 지위가 재상보다 높은 자립니다. 그 당시 기록에 보면, 술관원은 너 댓 가지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 나와요.
첫재는 음식에 독이 들어가 있는지 맛을 봐야 됩니다.
둘째는 왕이 누구와 접견해야 될 지를 결정하는 일을 합니다.
셋째는 왕의 개인적인 고민을 나누는 삶의 동지로서의 일도 해야 합니다.
넷째는 주연의 총 책임지가 돼서 매일 같이 거행되는 주연을 총괄합니다.
그리고 다섯째로, 왕의 명령을 시행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습니다.

왕의 생명이 술관원에게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술관원의 자리가 상당히 높은 자리였다는 것은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고통의 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을 자기의 아픔으로 자신의 괴로움으로 느꼈습니다. 정말 한 인간의 성품으로서는 고개가 숙여질 정도입니다. 존경스러운 인물입니다. 왕궁의 제국에 있어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1,600km 떨어져 있는 동족들의 아픔을 마음에 담고 울었다. 이것은 인격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 있는 생면부지의 사람들 느헤미야가 그들을 언제 봤습니까?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고난을 자기와 동일시 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추운데서 떨고 있는 수 백명의 고통의 무게가 내가 누워 있는 침대의 이불보다 무겁지 아니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바깥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떨고 괴로워한다 해도 오늘 내가 누리고 있는 작은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버리기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아까 말한 대로 대제국의 막강한 권세를 가진 사람이 무엇 때문에 그것을 버리고 어려운 삶을 지향할거냐 이말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느냐?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말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울고 가장 작은 자와 함께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 42절에 보면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시니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소자를 사랑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그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다 그렇잖아요.

남북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미국 버지니아주의 리치먼드 교회에서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데, 한 흑인이 백인 예배당에 들어왔습니다. 잘 차려입은 백인들로 교회는 가득한데 누구 한사람 이 흑인에게 자리를 권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속된말로 검둥이가 백인들에게 들어왔으니 경멸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 흑인이 어찌할 줄 모르고 있다가 제단 앞에 걸어 나와서 마룻바닥에 딱 꿇어앉았습니다. 그런 중에 한 노신사가 이러나 그 검둥이 옆에 같이 꿇어 앉습니다. 그러니까 그 에배당에 앉아있던 모든 백인들이 부끄러움을 느껴가지고는 한사람도 그 자리에서 앉지 아니하고 다 마룻바닥에 꿇어앉았습니다. 그 노신사가 누구였냐? 하면 바로 남부 연합군을 지휘했던 로버트 리 장군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참된 리더십은 재능이나 힘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낮은 자와 함께 낮은 마음을 품을 줄 아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하면, 아파서 고통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들의 아픔에 슬퍼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부귀영화 권세를 다 내려놓고 성벽 재건을 결심했습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바른 모습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반드시 성벽을 재건해야 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성벽재건을 해야 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 성전을 지키는 성벽이 없었기 때문에 계속 유린당하여 살 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돌아가 봐야 삶의 안전이 보장 안 되니까 안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성벽이 없으면 삶의 안전을 담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스룹바벨의 1차 귀환과 에스라의 2차 귀환 때, 5만 명이 넘게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5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으로 돌아갔지만, 그 현실은 자기들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처참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낙심하여 바사 땅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신앙의 땅이라고 해서 고국으로 돌아갔는 데 가 보았더니 이것은 사람 살 데가 아닌 것입니다. 아무런 안전의 담보도 없고, 인간적인 어떤 최소한의 삶의 기반도 없이 유린당하여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며 살고 있었습니다. 과거 화려하고 큰 성이었던 예루살렘이 4,000명밖에 사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지극히 작은 성읍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귀환을 안 한 것이지요.

1차 때 49,897명, 2차 때 1,754명이 귀환했는 데, 1차 귀환 때의 귀환자들을 보면,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의 귀환 숫자가 일반인들보다 더 적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한마디로 말해 종교지도자들이 더 안돌아 갔다는 것입니다. 안 돌아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제국 땅에 이미 삶의 기반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고 황무지 같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일반 백성들도 2차 귀환 때는 1차의 한 30분의 1밖에 안 갔는 데 왜 그랬습니까? 그만큼 예루살렘 상황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귀환하기를 꺼려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걸 현실적으로 생각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 고토에 살고 있는 4,000명도 누구냐 하면, 강도들이 들어와도 가져갈 아무것도 없고, 빼앗아갈 것도 없는 그런 비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지만 그나마도 성벽이 없어서 수시로 빼앗기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추수 때가 아닌데도 이방 민족들이 쳐들어와서 탈취한 기록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성벽재건이지만 그 기적의 원인은 느헤미야라는 한사람의 인격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느헤미야에게서 가장 위대한 점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런 동족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둘째, 느헤미야의 고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4:7,8)
느헤미야 4장 7절과 8절을 보면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굳게 결심을 하고 성벽재건에 나섭니다. 그런데 그 일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적들이 예루살렘을 사방으로 둘러싸서는 무차별적으로 비난과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총독인 산발랏과 암몬 총독 도비야가 반대를 주도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재건을 근본적으로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벽을 재건하지 못하도록 온갖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치겠다고 전쟁을 선포하여 두렵게 하였으며, 느헤미야를 죽이기 위해 암살을 계획하고, 유다 백성들이 바사를 배반하기 위하여 성을 건축하는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 갖은 궤계를 다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를 비롯해 유다 백성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한 마음이 되어 그들의 그러한 공격을 한 손엔 장비를 다른 손엔 병기를 들면서 불철주야 일을 하여 성벽 재건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짐승들만 다니던 황무한 땅이 역사적 성지가 되고 낙원이 되는 이런 기적의 사건이 느헤미야라는 한 사람의 인격과 신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예루살렘 백성들이 느헤미야의 지도에 따라 일치단결하여 갖은 난관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공격과 비판을 가혹하게 해도 주를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가 된다면 능히 이겨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느헤미야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계속되어온 일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나 비판은 역사 속에서 계속 되어 왔습니다. 한 시대가 또 다른 시대로 바뀌어갈 때마다 격동기에 언제나 있었던 것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입니다. 기독교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랍니다.

초대교회 때를 보세요. 세상에 적대적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둘러싸이고 세상이 압력을 가하기 때문에 사방에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박해와 육체적 고통이 대단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 때는 ‘교회가 어린아이를 잡아 먹는다.’ ‘피의 제사를 드린다’는 네로 같은 경우에는 기독교가 로마시를 불 질렀다고 하면서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을 처형했는지 모릅니다.

오늘날도 도비야나 산발랏이 없겠습니까?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사방에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위대한 작가 잔 가드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21세기 교회는 양쪽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 오늘날 교회는 교회 안팎 양쪽에서 십자포화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21세기는 언론과 현대인들의 정서를 통해 더욱 비판을 당하고 있습니다. 쏟아지고 있는 그 비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그룹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무차별적인 비판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를 비판할 때, 사회학적인 각도에서 비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사상가 중 하나인 도올 김용욱 같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자기는 교회 나가지도 않으면서 비판을 위해 비판하는 무차별적 비판자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런 무차별적인 비판자가 아주 많습니다.

또 하나의 그룹은 애정을 가진 비판자들이 있습니다. 애정을 가진 비판이라고 해 봐야 그들이 교회를 아끼는 마음이라고 전제 하지만, 근본은 비판정신입니다. 그렇다보니 결국엔 믿음이 어린 수많은 교인들이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MBC에서 교회를 내리 치고 있는데, MBC의 문제는 언론 내에 있는 친북세력과 안티기독교 세력이 연합해서 몇 몇 목사의 부도덕성을 비판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독교 자체에 대한 공격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비판은 개인의 허물을 전체 목회자가 다 그런 것 처럼 비판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사실 그렇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목회자가 10만 명이 넘는 우리나라 전체 목회자들 중에 몇 %나 됩니까? 그렇게 호화롭게 살고 있는 목사님들이 우리나라에 몇 명이 되겠느냐고요. 1%는 커녕 0.1%도 안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목사님들 가운데도 몇 분이나 되겠어요. 보리밭에는 깜부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식으로 비판하면 안 됩니다. 몇 몇 교회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대다수의 교회는 지출과 결산이 투명합니다.

십일조 문제도 봅시다. 십일조라는 것은 구약 시대 때부터 있어온 것입니다.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그의 모든 소유의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드립니다. 또 야곱은 창세기 28장에 벧엘에서 환상을 본 후에 자기가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 그의 모든 소유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겠노라고 서원합니다(창 28:22). 모세 때부터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십일조를 제정하셨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십일조에 관해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마 23:23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바치는데 집 뜰의 채소의 극히적은 수입의 십일조까지 철저하게 11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십일조 정신이 포함된 십일조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A. D. 400년까지만 해도 십일조에 대한 시비가 전혀 없었습니다. 십일조는 모든 교회에서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 교세가 점점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십일조가 하나의 원칙으로 정해지게 되는데, A. D. 800년 경 샤를마뉴 대제 때, 법령으로 십일조가 공포됩니다. 13세기 이전까지는 십일조의 대상이 금전이 아니라, 대부분이 토지의 소산물이었기에 교회마다 십일조 곳간이 있었습니다.

중세시대로 접어들면서 교회법에는 십일조에 대한 규정이 매우 구체적이 되는데, 13세기 이후부터 십일조에 대상이 토지 소산물에서 모든 종류의 이득과 임금에까지 확대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 십일조 대상이 되고 또 누가 십일조 대상에서 제외되는지 상세하게 규정하였습니다. 기록을 보더라도 초대교회 때부터 십일조는 당연히 교인들이 행해왔습니다.

십일조에 대해 루터(Martin Luther)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루터가 살았던 시대에도 당연히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루터는 농민들의 가축에 대한 십일조 면제 요구에 대해 한 마디로 “십일조의 폐지는 도둑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인 루터 역시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십일조를 폐지할 생각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십일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재정에 대해서 말들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가톨릭교회나 사찰은 제직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수입과 재정을 감시하는 시스템도 없어요. 가톨릭은 헌금이 대교구로 올라가고 대교구에서 거두어진 수입은 교황청으로 보고됩니다. 그런데 그건 절대 공개 안합니다. 사찰도 마찬가지고요. 사찰에 재정 감사 기관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유독 교회만 재정지출을 알 수 없는 것 처럼 비판하는데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런 비판 속에서도 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눈 감으면 안 됩니다. 한편은 교회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은 그 비판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비판의 문제가 되는 것이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라도 분명히 비판의 요소가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비판 중에 우리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회개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지나치게 호화로운 것은 박수 받을만하지 못하잖아요? 그렇죠? 종교인으로 그런 비판을 들었을 때, 우리는 겸허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olyd-Jones)목사님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 사모님이 인터뷰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을 생각하면 가장 인상에 남는 모습이 어떤 것이냐? 물었을 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살아 계실 때, 밤마다 침대에 엎드려서 우는 모습을 봤어요.” 그러니까 이 양반이 자다가 새벽 1시에 일어나, 소리 없이 영감님이 울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교회의 타락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국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가장 인상에 남는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역사 자기 민족의 모든 죄를 자기 것으로 다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그리스도적인 자세입니까? 이렇게 진정 자기 잘못으로 받아들인 것이 되면 거거에서 변화의 기운이 시작되어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문제의 시작과 해결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느헤미야 2장 5절에 보면, “왕에게 고하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느헤미야는 다른 어떤 사람을 보내달라고 하지 않고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섭니다. 이것이 정말 바른 기도입니다.

오늘 느헤미야의 이 기도의 핵심은 자신의 헌신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도 그렇고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에서도 정말 전적 헌신이 참 중요합니다. 찰스 스탠리 목사님이라는 아주 신실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현재, 1만 명 정도 모이는 애틀란타 제일 침례교회 목사님인데 가정의 위기에 대해서 많은 글을 쓰셨브니다. 스탠리 목사님이 오랜 기간을 부부들과 상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나 아내에게 문제가 별로 없는데도 이혼이 많더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성실하고 상식이 있습니다. 아내고 성실하고 괜찮은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혼을 많이 해서 왜 그런가? 분석을 했더니 결혼할 때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덕 보자고 하는 마음으로 출발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위하여 희생하겠다는 마음이 하나도 없이 결혼합니다. 누구나 결혼할 때 내가 너를 거름으로 해서 꽃을 피우겠다. 이런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거름되어 주겠다는 이 마음이 없이 결혼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재능이든 어떤 사회적 조건을 갖추었든지 간에 그것으로는 가정의 행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이 스탠리 목사님의 결론이었습니다.

부부간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희생해버리는 마음입니다. 희생하겠다는 마음을 가질 때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 어떻게 변화가 옵니까? 결혼생활 하신 분은 다 아시잖아요. 한 사람의 헌신이 기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헌신을 결정할 때 보면 어려움도 있습니다. 희생하려고 할 때, 가장 두려운 것은 이 희생의 결과에 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희생했다가 그 희생이 아무런 결과도 없이 그냥 일방적인 나의 희생으로만 끝난다면 그러면 나는 뭐냐? 바로 그것 때문에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헌신이 뭡니까? 철저하게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래 나는 너에게 철저히 이용당하리라, 나를 마음껏 이용해라. 나는 너를 위해서 이용당하기 위한 존재로 태어난 것이 아니냐? 그래 짓밟아라. 이용해라. 나는 그 자리에서 깨끗이 없어지고 잊혀 지겠다는 그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헌신은 약속 없는 미래를 붙잡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부터 헌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제 기도를 시작한 지 4개월이 지난 어느 날, 직무를 수행하는 느헤미야에게 왕이 말을 건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기도하며 기다리다고 해서 그냥 세월만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투자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 동안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우리의 주위 환경을 준비시켜 놓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늦게 깨달아서 그렇지, 기도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둘러싼 상황을 변화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해 놓고 응답이 안 나타나면, 조바심을 하면서 전전긍긍합니다. 제가 이렇게 보면, 엘리베이터를 탈 때, ‘닫힘’ 버튼을 안 누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엘리베이터 버튼 중에 가장 많이 닳아 있는 것이 ‘닫힘’버튼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닫히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 얼마를 기다리지 못해 버튼을 누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임을 알면서도 그 얼마를 못 기다려서 ‘응답’버튼을 눌러댑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기다리면서 끝까지 하나님께 매달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아닥사스다 왕이 성벽재건을 허락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 일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회복시키실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도 움직이시고, 왕의 명령도 취소하게 하실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이제 왕이 느헤미야에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수색이 있느냐? 마음에 무슨 근심이 있는게 분명하구나.”
왕이 식사를 준비하는 느헤미야에게
“네 얼굴이 이렇게 안 좋으냐? 수심이 있느냐?”

이렇게 물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가 자기 스스로 먼저 말을 할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섬기는 자, 신하이기 때문에 자기가 먼저 “나는 예루살렘에 가겠습니다.” 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왕이 먼저 안색을 걱정하며 물어왔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느헤미야 2장 3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

여기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언급하지 않고, ‘나의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이 왕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동 특히 바다 인들도 유대인들 처럼 조상의 무덤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느헤미야에게 하나님이 순식간에 준 지혜였음이 분명합니다. 말의 지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다시 왕이 묻습니다. “그럼 내가 무엇을 해주기 원하느냐?” 이 말을 듣고 느헤미야는 곧 바로 하나님께 묻고합니다. “내가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이 기도를 ‘화살기도(Arrow Prayer)’라고 합니다. 날아가는 화살처럼 순간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이 하늘의 하나님이 자기가 4개월 동안 기도하던 그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묵도란 것은 정말, 그 순간 찰나의 짧은 시간에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기도 후, 느헤미야는 자기를 조국 땅에 보내서 성벽을 재건하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러자 아닥사스다 왕은 놀랍게도 허락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방 대적자들의 끊임없는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52일 만에 모든 공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느 6:15).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을 통해 허락받는 그 짧은 시간을 위해서 4개월간 기도했따는 사실입니다.

오늘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하는 일을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그 일은 하나님의 도움없이는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4개월 동안이나 기도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 기도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도 없습니다.

오늘 느헤미야의 기도가 위대한 것은 바사 제국의 높은 고위관리로서 모든 권세와 영화를 내려놓고, 자신이 제물이 되겠으니 사용해 달라고 기도한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의 그러한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불가능했던 성벽 재건이 52일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기도를 통해 자신을 헌신의 제물로 드린 느헤미야처럼 우리도 기도를 통해 헌신된 일꾼이 되어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짐승만 다니고 버려진 황무한 땅에 느헤미야 한 사람의 신앙적 삶을 통해 거룩한 성지가 되고 낙원이 되는 위대한 역사를 갖고 온 놀라운 사건입니다. 헌신적인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체험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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