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6] 프랑스 개혁교회의 요람, ‘작은 제네바’ (2)
비스꽁티(visconti) 거리는 프랑스에서 최초로 목사가 위임받은 곳이기도 하며, 그 목사가 첫 세례를 베푼 장소이기도 하다.
1555년에 이곳 주민들이 모인 가정교회는, 22살에 법을 공부한 쟝 르 마송(Jean le Maçon)이라는 젊은 청년을 이 교회의 목사로 위임했다. 그리고 모임의 대부분은 이 거리의 지하실에서 모임을 갖게 되는데, 그 이유는 경찰의 기습을 좀 더 쉽게 피하기 위함이었다.
기자는 마침 지하교회로 모였던 지하실 사진을 어렵게 구하여 독자들에게 공개한다.
비스꽁티 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역사적 장소가 된다. 이곳에서 72개 교회의 대표들이 모여 프랑스 최초로 교회 회의를 갖는다. 이들이 모인 건물은 어떤 한 자작의 소유로 식당 겸 여인숙이었다. 오늘날 총회에 해당하는 이 모임은 1559년 5월 25일부터 29일까지 열렸다. 이 총회는 깔뱅(칼빈)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의 개혁교회들이 모인 첫 총회이다.
깔뱅은 스트라스부르그와 제네바에서의 두 교회를 모델로 규칙을 제정하는데, 1559년 프랑스의 개혁교회에서 대표들이 모인 첫 총회에 신앙고백과 규범을 전달하였고, 투표로 수용하게 된다.
프랑스 개혁교회가 채택한 신앙고백은 깔뱅의 초안으로 40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고, 1571년 라호쉘 총회에서 비준되었기 때문에 훗날 라호쉘 신앙고백(Confession de foi de la Rochelle)이라 불린다. 이 신앙고백은 프랑스에서 250년 동안 계속되었고, 개혁교회와 로마 교회의 차이점을 밝히고 있다. 이 고백에서 로마 교회의 성인과 관련된 사상, 연옥, 교회의 권력에 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 신앙고백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신앙고백의 대부분은 깔뱅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이다.
당시 박해 아래 있던 프랑스 개신교도들이 제1차 연합모임에서 프랑스 내의 박해받는 개혁교회들을 위해 「프랑스 왕국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La Confession de foy des Eglises reformees du Royaume de France)」을 채택하게 된다. 이는 신앙의 길잡이가 되며 또한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신앙의 내용을 정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모인 신자들은 이 신앙고백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들의 성공적 위치를 포기하고, 자신들이 고백한 신앙을 위해 순교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귀도 드 브레(Guido de Bres)는 이 프랑스 신앙고백을 기초로 1561년에 「벨직 신앙고백(Confessio Belgica)」[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신자들의 공동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신앙고백(Confession de foy, Faicte d'vn commun accord par les fideles qui conuersent s pays bas)]을 작성하게 되고,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공식신앙고백으로 수용되었다.
다른 유럽보다 개혁교회는 늦게 시작했지만 유럽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신앙고백서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 모임이 있었던 곳이 바로 이 거리이다. 이 거리의 5, 7, 9 번지 건물은 16세기 건물이며, 나머지 모든 건물들은 17, 18세기 건물들이다.
안타까운 것은 첫 교회 회의 개최를 위해 이 건물은 내어준 한 자작의 부인과 그의 아버지는 회의가 있던 해에 체포되고, 이 건물에 더 이상 모임을 갖지 못하도록 무장한 50명의 군인들이 이 거리를 지키게 됐다는 것이다.
교회사 가운데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많은 이들의 수고와 눈물이 깔뱅의 종교 개혁을 가능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비스꽁티 거리에서 프랑스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던 쟝 르 마숑은 1559년 제1회 프랑스 교회 회의 사건과 관련되어 더 이상 목회를 못하게 되고 엉쥬(Anjou) 지역으로 피신을 하여 각 도시에 각각 그 도시의 첫번째의 교회들을 세우는 일을 하게 된다. 그가 세운 교회들로 인하여 파리, 모, 쁘아띠에와 함께 중요한 개혁 도시가 된다.
한편 처음 교회가 세워졌을 때, 앞서 ‘생 제르망 데 프레 성당 주변’ 편에도 언급된 베흐나 빨리쉬(Bernard Palissy 1510-1590)와 같은 교인들이 출석하게 된다. 베흐나 빨리쉬는 유명한 도자기공이며, 작가이며 기발한 과학자이다.
이번에 찾아낸 문서를 통해 파리 최초 교회 태동에 빨리쉬가 많은 역할을 하였고 그리고 그 교회의 일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1510년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이름이 완전하게 알려지기 까지 50년의 무명의 예술가로 세월을 보내었다.
1539년부터 그는 이탈리아에서 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 에나멜의 비밀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노력의 결과 16년 후인 1555년에 마침내 성공하여, 아름다운 도자기들을 만든다. 이 해는 그가 살고 있던 집의 거리에서 처음 교회가 시작되는 해이기도 하다. 빨리쉬는 시골 도자기공에서 독학으로 흙 예술의 거장으로 알려지며, 안느 드 몽모흥시(Anne de Montmorency)와 캐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édicis)의 보호를 받게 된다. 바돌로메 학살 때에도 독실한 신앙인으로 스당(Sedan)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 안전하게 있을 수 있었다.
1540년에 도시 상트(Saintes)에서 개혁주의에 합류하였고, 1558년부터 그에 대한 이단 죄명으로 사전 구속 영장이 발부된다. 그는 개신교 신앙을 가진 이유로 최소한 3번 투옥된다. 핍박으로 1585년에 은둔하였다가 1586년 12월에 1584년까지 그가 살던 마레 거리(rue des Marais, 현재는 visconti 거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그 시대에 개신교인들의 평화의 항구로 작은 제네바였다. 1580년에 그는 컨퍼런스 주제들을 출판하는데, 이 책은 과학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책이다.
그는 호비노(Robineau) 가족의 한 사람인 한 재단사와 그의 형제와 함께 체포된다. 그 후 파리에서 다시 생활하다가 이단 죄명으로 1587년에 체포되어 추방 명령을 받지만, 프랑스를 떠나라는 명령을 무시하다가 다시 체포된다. 이번에는 교수형이 선고된다.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590년에 바시티유 감옥에서 사망한다.
1583년에 그는 비스꽁티 거리와 보나빠트 거리(rue Bonaparte)가 만나는 지점에 큰 집을 구입하는데, 26미터의 길이인 이 거리의 16에서 26번지 사이에서 3년(1584-1587)을 생활한다. 그의 동상은 공원에 있으며, 8번지는 그가 세례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가난한 무명 예술가에서 성공한 알려진 유명인이 되었으나 포기할 수 없는 신앙 때문에 그는 고난을 자초한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워낙 유명한 예술가였기에 당시 권력자들도 함부로 죽일 수도 없는 딜레마를 안겨준, 믿음의 산 증인이었기에 한국교회에 소개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