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4] 깔뱅 생가 - 느와용(Noyon)
느와용(Noyon)은 파리에서 북쪽으로 11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으로 인구는 15,000명 정도이며 전통적으로 가톨릭의 중심 도시이다. 깔뱅(칼빈)은 이곳 느와용 대성당의 위세를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근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삐까흐(Picards) 지방의 도시인 느와용은 북부 프랑스의 역사적 도시 가운데 하나다. 531년 첫 주교로 생 메다르(Saint Médard)가 부임했으며 641년부터 660년까지 주교 생 엘루아(st Eloi)에 의해 이 지역이 가톨릭 중심 도시가 된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성당은 12세기 건물로서, 고대 고딕 성당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느와용 대성당은 768년 샤를마뉴가 대관식을 한 곳이며, 느와용은 프랑스 종교 개혁이 있기 전까지 북부지방의 문화적,·정신적 중심지였다. 하지만 성당 서기들에 의한 권력 분쟁과 시민 권리를 위한 투쟁의 중심지가 되고, 1108년 성당 내 분열로 인해 단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곳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깔뱅은 1509년 7월 10일 느와용에서 태어나 어머니 쟌느 르프랑(Jeanne Lefranc)의 깊은 신앙에 영향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깔뱅은 어머니로부터 감성적인 신비주의를, 아버지 제라흐 꼬뱅(Gérard Cauvin)에게서는 삐까흐 지방 사람들이 갖고 있는 반항적인 기질을 물려 받는다.
생가는 종교 전쟁과 침략 속에서도 보존되었는데, 1553년 2월 깔뱅은 편지에서 “내 아버지 집은 파괴된 도시의 잿더미 속에 홀로 남아 있다”고 기록한다.
깔뱅 생가는 1914년에서 1918년까지의 전쟁 때 파괴되는데, 남아 있는 사진 자료에 보면, 1914년 이후 독일이 느와용을 점령하면서 “이 집은 개혁자가 태어난 역사적인 장소”라는 표지판을 부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전쟁의 마지막 해 1918년 독일군이 떠날 때 생가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깔뱅의 생가는 그림과 판화, 그리고 17세기에 건축된 건물의 1918년 이전의 사진으로 본래 모습을 추정하여 복원하였다.
빠니에(Pannier) 목사와 가톨릭 건축 사제인 라뇨(Mgr Lagneau) 두 사람 사이의 우정과 그리고 프랑스 개신교 역사협회의 도움으로 유적지 구입을 하게 된다. 그리고 국제 회원 가입을 통해 1917년 이전의 건물을 복원했다. 이어 상층을 추가하여 1930년에 박물관으로 만들었으나, 1944년에 폭탄 테러로 손상되었다. 그리하여 1954년에 재건축하였고 1983년에는 현대식으로 만들었다. 깔뱅 생가는 현재 프랑스 개신교 역사협회 소유이나 느와용 시에서 위탁하여 관리하고 있다.
깔뱅 생가에 세워진 박물관은 성경, 신약 성경, 주석 등 중요한 많은 원본들과 중요한 초상화가 소장돼 있다. 4개의 전시 공간에 개신교 역사와 개혁가들의 개인적 저서들, 특히 16세기의 희귀한 인쇄물들(면죄부 등), 그림과 동판화, 집기류 등이 전시되고 있다. 또 깔뱅의 사촌인 올리베떵(Olivetan)이 1535년에 번역한 프랑스어 성경과, 기독교강요 1536년판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새로운 사실은 이 원본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서문에 프랑수와 1세가 아닌 마흐규리트 드 엉굴렘에게 헌정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16세기의 정치, 종교적 중요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이 있으며, 깔뱅을 비롯한 개혁자들의 동판화 초상이 있다. 또한 1534년의 유명한 벽보 사건의 문서들과 메달, 도장, 사막에서 피신하여 예배드릴 때 사용했던 의자와 16세기 당시의 상자 등 오래된 가구들, 깔뱅이 가르칠 때 사용한 의자를 복제한 것도 있다.
깔뱅은 1509년 7월 10일에 느와용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4세에 파리에 있는 꼴레쥬 몽떼규 입학을 위해 느와용을 떠나게 된다.
그후 오흘레앙, 부르쥬에서 공부하였고 이곳에서 인문주의 사상과 무엇보다 루터의 설교를 접하게 된다. 프랑스 개신교 역사에 의하면 1532-1533 겨울에 깔뱅은 루터파가 된다.
1531년 5월 26일에 임종하는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생가를 방문하고, 1534년 5월 4일에 마지막으로 생가 느와용에 가서 사제직을 반납한다. 이후 권력에 의해 스트라스부르그, 발(Bâle)을 거쳐 제네바에서 정치 난민으로 23년의 생애를 보내며, 전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저술을 마치고 1564년 5월 27일에 소천하게 된다.
느와용에서 깔뱅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이곳에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가가 위치한 쁠라스 아리스티드 브리엉(Place Aristide Briand)를 중심으로 깔뱅의 길(rue calvin )과 나란히 올리베떵(rue Olivetan)의 길이 있다. 올리베떵은 파리에 머물고 있던 깔뱅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개신교인을 위한 성경을 번역하여 종교 개혁에 큰 기여를 한다.
제라흐과 잔느 르프랑 사이에 5명의 아들이 태어났는데, 첫째 샤를르(Charles)는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사제)가 되었지만 후에 이단으로 고발되어 1537년에 파문된 채 사망했다. 둘째가 깔뱅이었고, 셋째인 앙뚜완느(Antoine)는 제네바에서 깔뱅과 합류하여 깔뱅의 신실한 협력자로 일했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의 동생인 앙뚜완느와 프랑수와(François)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깔뱅은 이 마을의 부르주아이며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 쟌느 르 프랑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는데, 어머니는 그를 교회와 여러 성지들에 데리고 다녔다. 깔뱅의 아버지는 아내가 사망한 후 재혼하여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 깔뱅의 두 이복 동생 가운데 마리(Marie)는 두 오빠를 따라 제네바로 와서 살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한 명은 누와용에 남았다.
깔뱅이 처음으로 다녔던 학교는 느와용에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 참사회가 운영하던 소년 학교 까뻬뜨(Cappettes)였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깔뱅은 11살이 되던 해인 1521년 5월부터 대성당으로부터 성직록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깔뱅이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사제)가 되기를 원했으나, 아들이 진로를 바꾸면서 바람이 성사되지는 못했다.
이곳을 방문할 때 관리자에게 영화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면 깔뱅의 생애를 다룬 짧은 영화를 볼 수 있다(영어와 불어, 두 언어 중 선택). 성당 방문시 느와용을 소개하는 역사에서 1509년 종교 개혁가 깔뱅 탄생이라는 문구도 볼 수 있다.
성당은 참사회원 구역 안에 있고, 참사회원 구역은 5개의 건물(식당, 종교 재판소, 참사 회의실, 보물보관 건물, 도서관)로 되어 있다. 17, 18세기에 참사원들에 의해 세워진 건물들은 성당 광장을 에워싸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