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9] 깔뱅이 교육받은 학교들 (3)
1527년의 깔뱅, 파리에서 오흘레앙으로
오흘레앙은 백년전쟁 당시 영국군의 수하에 들어갔다가 쟌 다르크가 1429년 5월 7일 입성하여 5월 8일에 영국군을 퇴각시킴으로써 백년전쟁 중 프랑스군의 최초의 승리를 안겨주었던 도시다. 이 전투로 프랑스는 영국군을 프랑스에서 퇴각시킬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됐다.
파리에서 약 130Km 떨어진 오흘레앙은 쟌 다르크의 대활약으로 더 유명한 곳이지만, 사실 오흘레앙이 있는 발 드 루와르 (Val-de-Loire) 지역은 깔뱅이즘(칼비니즘)의 대로(大路)라 불리는 중요한 지역이다. 쟌 다르크가 입성한지 백 년 즈음이 지나 깔뱅이 학업을 위해 도착한 오흘레앙은, 개신교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다 준 새로운 개념들이 흘러 넘쳤다.
깔뱅의 제자 테오도르 드 베즈는 그의 저서 <교회 역사>에서 “부르쥬, 뚤루즈와 함께 오흘레앙 대학은 16세기 초반부터 프랑스 왕국 전체로 흘러넘치게 하는 세 개의 우물과 같다”고 했다. 당시 오흘레앙은 유럽 최고의 대학으로, 유럽 전 지역에서 많은 학생들이 학업을 위해 모였는데 그 중에 독일 유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루터주의자로서 대학 부속의 근처 작은 성당에 모여 예배를 드렸지만, 1525년부터 정부로부터 금지를 당한다.
이러한 오흘레앙에 많은 인문주의자들과 종교 개혁자들이 머물렀으며, 학업을 마치고 교수가 됐다.
한편 많은 개혁자들이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 프랑스 최초의 교회가 세워졌던 모(Meaux)의 위그노 직조공들은 1546년 박해로 교회를 폐쇄되자 이곳으로 이주했다. 이로써 오흘레앙은 개혁 사상가들과 개혁 실천자들이 함께 모임으로, 개혁 사상들이 더더욱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배경 속에 개혁 운동은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수천 명의 위그노들이 예배에 참석하였다.
오흘레앙은 1562년에서 1568년에는 로잔 아카데미 출신의 헬라어와 히브리어 교부 신학 교수들에 의한 신학교가 운영됨으로써 개신교의 수도(首都)로서의 역할을 하였기에 ‘새로운 제네바’라 불렸다. 종교 전쟁 때는 위그노 군대의 첫 집합소로, 처음 세 번의 전쟁에서 중심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인문주의와 개혁주의의 집합소인 이곳 대학에서는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이론들이 많이 나왔다. 이곳에서 학업한 사람들 가운데는 깔뱅을 비롯하여, 개혁 사상의 기초를 제공한 르페브르(Lefèvre d’Etaples), 훗날 이 대학에 교수로 있다가 1557년 개혁주의 신앙 때문에 화형 당한 안느 듀 부흐(Anne du Bourg), 깔뱅의 교수인 삐에르 드 레스트왈(Pierre de l'Estoile)과 멜키오 볼마(Melchior Wolmar), 깔뱅의 사촌인 올리베떵(Olivetan), 꼴레쥬 프랑스(Collège France)의 설립자 귀욤 뷰데(Guillaume Budé), 깔뱅의 제자인 테오드르 드 베즈(Théodore de Bèze) 등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의 거장들이 있다.
깔뱅의 아버지 제라흐 꼬뱅(Gérard Cauvin)이 느와용 참사회와 불화를 겪으면서, 신학이 아닌 일반법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어 돈을 벌도록 하기 위하여 깔뱅을 오흘레앙으로 보낸다. 처음에는 사제가 되게 하기 위하여 파리로, 이젠 돈을 벌게 하기 위해 오흘레앙으로 아들을 보내는데, 보내는 곳마다 개혁 사상이 넘치는 근원지였던 것이다.
파리가 아닌 오흘레앙을 선택한 것은 파리에는 교회법 학과만 있었기 때문이며, 또 당시 학문적인 대단한 명성을 가졌던 삐에르 드 레스트왈(Pierre de l'Estoile)에게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개신교 운동의 반대자였고 후에 프랑스 의회 의장을 역임하는 사람이다. 깔뱅은 그를 통해 고전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인문주의 사상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깔뱅은 꼴레쥬 몽떼규에서도 스승 존 메이저(John Major)를 통하여 자칫 가톨릭 신학의 교조주의(敎條主義)로 전락할 뻔했던 것처럼, 오흘레앙 대학에서도 위그노 박해에 앞장 선 프랑스 의회 의장까지 역임하는 레스트왈 아래에서 지도를 받았지만 유유히 흐르는 개혁주의 사상은 깔뱅을 그 자리에 그냥 두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깔뱅을 사용하시기 위해 먼저 일하신 결과임이 틀림없다.
특히 오흘레앙에서 깔뱅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스승을 만나는데, 독일계 인문주의자이며 희랍 철학자인 멜키오 볼마(Melchior Volmar)이다. 나중에 독일로 돌아가 튜빙겐 대학에서 법학 교수를 하는 그는 루터의 영향을 받아 개혁 사상에 대하여 개방적이었다. 헬라어를 가르치면서 신약성서 원문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복음의 진수를 가르쳐 주므로, 깔뱅과 테오도르 드 베즈에게 개혁자의 길을 가게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볼마 교수가 1529년 부르쥬 대학으로 옮겨 갈 때 깔뱅도 함께 이주한다. 깔뱅은 볼마 교수를 통해 루터의 사상들에 대하여 좀 더 구체화하게 된 듯하다.
오흘레앙에서 깔뱅과 위그노의 흔적들
오흘레앙은 인문주의의 발달로 자연히 인쇄술도 발달하게 된다. 레크리비느리 거리(rue de L'Ecrivinerie) - 현재는 현 뽀티에 거리(rue Pothier)에는 사법서사와 도서 출판가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 오흘레앙 출신이자 깔뱅이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학업했던 꼴레쥬 프랑스 출신의 석학으로, 세계 최초로 번역 이론 체계를 세운 에티엔 돌레(Étienne Dolet 1509-1546)가 있다. 에티엔 돌레는 당시 금서(禁書)로 위그노들에게는 인기 서적이었던 끌레망 마호의 시편을 출판하자, ‘플라톤의 대화’ 번역 중 영생에 대한 불신을 암시하는 쪽으로 오역을 했다는 빌미로 이단 죄명을 받는다. 그리고 1546년 8월 3일에 37살의 나이로 파리의 한 광장에서 교수형을 받고 책과 시신도 불태워진다. 뽀티에 거리를 걷다가 첫번째 만나는 거리는 ‘에티엔 돌레의 길(rue Étienne Dolet)’로 명명된 길이다.
이 거리에는 옛 오흘레앙 대학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박사 학위 논문 발표장’(Salle des Thèses)으로 불리는 이곳은 시골 출신 젊은 깔뱅이 1528년부터 1532년 사이에 신학과 법학을 공부하고 정식으로 학위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뽀테른 거리(Rue de la Poterne)
지금은 위치를 알 수 없으나 이 거리에는 참사원 프랑수와 다니엘(François Daniel)의 집이 있었다. 학생 깔뱅이 살았던 집 근처에 살던 그는 깔뱅을 자주 대접했고 휴식을 갖게 했다. 프랑수와는 깔뱅이 제네바로 갈 때까지 계속 연락하고 지냈다고 한다.
그홀로 호텔
그홀로 호텔은 1549년 피혁 제조로 부유하게 되었고 개신교 공동체 회장이었던 제롬 그홀로 호텔(Jérôme Groslot)가, 당시 최고 위그노 건축가인 쟈크 앙드루에(Jacques Androuet du Cerceau)에게 요청해 건축한 건물이다. 이곳은 1560년 12월 5일 프랑수와 2세가 오흘레앙에서 열린 삼두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그의 젊은 아내(훗날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되는 메리 스튜어트)와 왕의 모친 캐트린 메디치와 함께 왔다가 숨을 거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아틀리에(작업장)에는 위그노 동료였고 후엉 지역의 유명한 위그노 조각가인 쟝 구종(Jean Goujon)에게 부탁해서 만든 조각들이 있다. 호텔 정원에는 에티엔 돌레의 반신상이 있다. 에티엔 돌레는 1509년 오흘레앙에서 출생했으며 책을 저술하고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프랑스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인 클레망 마호(Clément Marot)의 시편을 출판하여 개혁 신앙에 큰 도움을 주다가 순교했다. 제롬 그홀로가 위그노가 된 후, 왕명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지만 도주하여 부모가 살던 Chateau de L’Isle로 피신한다. 그리고 도주한 이곳 성은 1570년부터 1572년까지 예배 장소로 사용되지만, 1572년 8월 성 바돌로메 학살 때 완전히 파괴된다.
1562년에는 제3회 총회(synod)가 열리면서, 이곳 오흘레앙은 위그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도시가 된다. 또한 1563년 2월 24일에는, 위그노를 심하게 핍박하며 위그노 학살 때마다 등장하는 가톨릭 진영의 수장 프랑수와 드 기즈가 암살당한다. 프랑수와 드 기즈의 향년 44세, 암살자는 르와르 강 남쪽 지역 ‘앙부아즈 학살’ 때 자신의 어머니가 암살당한 개신교 신자 쟝 드 뽈트로 드 메헤(Jean de Poltrot de Méré, 1537–1563)였다.
오흘레앙에서 첫번째 건축된 개신교 교회당
‘개신교의 대로’, ‘새로운 제네바’로 불리우는 오흘레앙임에도 불구하고 1839년 이전에는 교회당 건물이 없었다. 낭트 칙령 후 1599년경에 오흘레앙에서 10Km 떨어진 보와니 쉬르 비온느 (Boigny-sur-Bionne)에 교회당이 세워져 80년 동안 남아 있었다.
오흘레앙에서는 쟝 달리베흐(Jean d’Alibert)나 처녀 막땅빌(Martinville)의 개인 집이나 쟈코방(Jacobins)의 곡식 창고 등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809년에 개신교들에게 예배가 허가되고 나서는 오래되고 불편한 쌍 뻬에르 렁땅(Saint-Pierre-Lentin) 성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가 1834년에서 1856년까지 목회한 호세로티 Rosselloty 목사가 쌍 뻬에르 렁땅 성당 수리로 예배 장소의 어려움이 있자 교회 건축을 결정하고 1836년에 시작하여 1838년에 완공한다. 이 건물의 원통 모양은 로마 시대의 무덤을 본딴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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