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10] 깔뱅이 교육받은 학교들 (4)
1529년의 깔뱅, 오흘레앙에서 부르쥬(Bourges)로
중세 도시의 육중한 무게감을 느끼려면 부르쥬로 가야 한다. 1324년 5월 13일에 완공되었으며 순교자 스데반에게 헌정된, 118m 길이와 어마어마한 높이를 자랑하는 부르쥬의 쌍 에띠엔느 대성당(La cathédrale Saint-Etienne)을 바라보면 파리 노틀담 성당은 왠지 왜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웅장함 앞에 초라한 자신을 경험할 것이다.
부르쥬는 오흘레앙에서 130Km 떨어진 대학 도시며, 16세기 종교 개혁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확산시킨 중심지이다. 부르쥬 대학은 나바르 왕국의 여왕 마흐규리트 드 나바르 (Marguerite de Navarre)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곳은 이미 쟈크 큐자스(Jacques Cujas)와 같은 유명한 교수들이 머물렀고, 깔뱅의 교수인 볼마가 마흐규리트의 초청을 받아 1529년 오흘레앙에서 부르쥬 대학으로 옮겨 오자 깔뱅 역시 그를 따라 이곳으로 와 1529년에서 1531년까지 만 2년간 공부한다.
또한 깔뱅은 인문주의 정신으로 로마법을 가르치고 있던 이탈리아 출신 안드레아 알치아티(Andreas Alciati) 수하에서 공부를 하며, 1532년 1월 14일 오흘레앙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변호사 자격을 획득한다.
마흐규리트 여왕 자체가 인문주의자이며 위그노들을 보호 육성하는 사람이었기에, 그가 초청한 교수들의 성향은 역시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볼마와 알치아티는 진보적 종교사상을 가진 루터에 매우 심취한 사람들로, 깔뱅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개혁자로서의 생각과 체제를 다지게 된다. 깔뱅은 볼마에 대하여 좋은 추억을 간직하였고, 훗날 1546년에 고린도후서에 대한 주석을 그에게 헌정하였다.
개혁자로서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던 깔뱅이 이곳에서 개혁자로서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아버지의 죽음이다.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주교와의 갈등으로 가톨릭 교회로부터 출교를 당했다. 아버지가 가톨릭 교회 신자로서의 권리와 자격을 파문당한 채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 깔뱅은 점차적으로 개혁자로 바뀌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깔뱅은 법 공부를 잠시 중단하고, 볼마 교수의 제안으로 오흘레앙에 가는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기록을 발견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그것은 그가 오흘레앙으로 간 이유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깔뱅은) 1531년에 신학 수업을 수강하기 위하여 오흘레앙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얻게 된다(En 1531, il retourne à Orléans pour suivre des cours de théologie et obtenir le diplôme de docteur en théologie)” -L'Encyclopedie de Bourges에서 인용.
이 자료가 사실이라면 깔뱅의 목사 자격에 대하여 늘 시빗거리가 되었던, “정규 신학 수업을 받지 않았고 철학과 법학을 전공함으로 학업을 마쳤다”는 자격 시비에 대하여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깔뱅의 회심
깔뱅은 추기경 사돌레(Sadolet)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회심에 관한 고백을 한다.
“나는 보았습니다. 마치 빛이 내 위에 막 쏟아져 비취는 것 같이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과오의 돼지우리에서 뒹굴고 있었는가를. 그리고 내가 얼마나 부정하고 더러웠는가를 밝히 보았습니다. 내가 빠져 떨어진 그 비참한 상태에 대한 나의 두렵고 떨리는 심정, 영원한 죽음의 절망에 대한 무서운 위협, 이런 것 때문에 나는 한 시간도 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즉시로 나는 당신의 지시하시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많은 통곡과 눈물로 나의 과거를 저주하면서 나는 떠났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시점이 언제일까? 깔뱅을 가장 잘 알고 있고, 깔뱅의 생애를 제일 먼저 기록한 베즈(Beze)는 깔뱅이 1528년에 회심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부르쥬에 도착하기 직전이거나 부르쥬에 머물고 있을 때이다. 본인도 베즈의 글에 동의하는 이유가, 깔뱅이 개혁을 외쳤고 그의 외침으로 순교자가 발생했던 부르쥬에서 정작 깔뱅 본인이 회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나 깔뱅과 같은 해에 소천한, 깔뱅의 스승이었던 마튀랭(Mathurin Cordier)도 1528년에 회심한다.
또한 깔뱅이 1532년에 출판한 ‘세네카의 관용론’을 보면 이미 그는 개혁자 입장에 들어선 모습을 볼 수 있다. 관용론은 네로(Nero)가 기독교를 박해한 것에 대하여, 학자로서 황제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기를 바라며 쓴 글이다. 그렇다면 깔뱅 역시 프랑수와 1세가 개혁주의자에 대해 탄압하는 것에 대해, 세네카와 동일한 마음을 갖고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발간했을 것이다. 교회의 평화는 칼이 아닌 하나님 말씀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당시 신앙을 위하여 순교하는 개혁자들은 소크라테스보다 더 용감한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더 이상 박해하지 말라는 글을 썼다고 한다. 부르쥬에서 깔뱅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 책을 쓰기 전 이미 회심한 것이 확실하다. 개혁주의가 싹트고 있던 파리와 오흘레앙, 그리고 마침내는 개혁주의의 열기로 들끓고 있던 부르쥬로 들어온 깔뱅은 이곳에서 개혁자로서의 생각과 모습을 갖추게 된다.
깔뱅이 다녔던 길
대학
대성당 아래쪽으로 위치한 대학에 알치아티와 볼마의 강의실이 있었다. 이곳의 법학부와 신학부는 많은 독일 학생들로 인해 루터교의 온상지가 되었고, 이로 인해 새로운 개혁 사상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부르쥬에는 여전히 깔뱅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깔뱅의 홀과 고흐덴 광장과 그의 집
깔뱅은 13세기 말에 만들어지고 1487년 화재로 심하게 파손된 어거스틴 파 수도원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수사학을 가르친다. 수도원 옆 ‘깔뱅의 홀’은 수도원의 식당 일부를 개조하여 만든 것으로, 깔뱅이 사용했던 매우 아름다운 고딕 양식의 강단이 있다. 지금은 건물 보존을 위해 일반인들에게는 공개하지 않는다.
이 길의 끝자리 고흐덴 광장에는 시장 상인들이 물건을 진열해 놓고 물건을 팔기 위해 올라가 소리쳤던 큰 돌이 있는데, 지금은 이 돌을 ‘깔뱅의 돌’이라 부른다. 그것은 깔뱅이 이 돌 위에 서서 개혁의 필요성을 외쳤기 때문이다.
깔뱅은 수도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었고, 당시 그가 살았던 집 뒤쪽으로는 개신교인들의 무덤으로 개혁주의 교수였던 아니에흐의 이름을 딴 아니에흐 공동묘지(Cimetière d'Asnières)가 위치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깔뱅은 수도원이 있는 거리 25번지에 살았다”고 기록돼 있는 두꺼운 역사책을 들고, 그곳을 찾아 카메라를 메고 나섰다. 그날따라 비는 억수같이 퍼붓고… 책을 비에 젖은 땅에 떨어뜨리기를 여러 번… 25번지를 찾기 위해 거주자들에게 수 차례나 물었지만 허탕이었다. 혹시나 해서 그곳 일대 사진을 다 찍어 두고 돌아왔다. 다시 자료를 찾다보니 23번지였다. 현장을 한 번이라도 가 본 뒤에 글을 써주었다면……. 참고로 프랑스는 길 한 쪽의 번지는 짝수이며 반대편은 홀수이다.
테오도르 드 베즈와의 만남
부르쥬에서 깔뱅은 또 한 번의 귀한 만남을 갖는데, 그 만남의 주인공은 그의 동역자이며, 후계자가 되는 테오도르 드 베즈(Théodore de Bèze)이다. 파리로 상경하여 공부하고 있던 베즈는, 1428년 12월에 멜키오 볼마의 수업을 받기 위해 오흘레앙 볼마 교수의 집에 머물다가, 볼마 교수를 따라 부르쥬로 오게 된다. 볼마의 제자인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볼마의 집에서 만나게 되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개혁자의 길을 함께 걷게 된다. 깔뱅은 이 우연한 만남으로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는 오랜 동역자를 얻게 된다.
베즈는 볼마의 집에서 1530년에서 1535년까지 공부한다. 그러나 1534년 프랑수와 1세가 개혁자들을 검거하라는 포고령을 내리자, 볼마는 독일로 돌아가 튜빙겐 대학에서 법을 가르친다. 베즈도 1535년에 부르쥬를 떠나 오흘레앙으로 돌아가 1539년까지 4년을 공부하고 1539년 8월 11일에 법률 학위를 받는다.
깔뱅의 다리
지금은 없어졌지만 아니에흐 레 부르쥬(Asnières-lès-Bourges) 방향으로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이곳은 1530년 만성절에 깔뱅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신앙에 관해 처음으로 말한 곳이기에 몇 세기 동안 ‘깔뱅의 다리’라고 불렸다.
개혁에 동참한 수도사들
깔뱅의 개혁 운동에 어거스틴파의 일부 수도사들과 쌍 엉부와(Saint - Ambroix) 수도사들이 참여하였는데, 수도사 쟝 미셀(Jean Michel)은 부르쥬에서 좀 떨어진 도시 성세흐(Sancerre)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파리에서 화형으로 순교한다.
개혁자들의 예배 장소
개혁자들은 꼴라동의 집(Hotel Colladon)에서 예배를 드렸고 가끔은 place Marcel Plaisnat에 위치한 베리의 공작인 쟝(Jean)의 궁궐(Palais des ducs de Berry)의 한 홀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꼴라동(Geramin Colladon, 1508-1594)은 1536년에서 1550년까지 거주하다가, 그 후 스위스로 가서 제네바 공화국의 시민 칙령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된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