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12] 니꼴라 꼽의 연설 사건 후, 엉굴렘으로
그동안 온라인상에서 매주 월, 목요일 2회씩 연재되던 ‘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가 다음주부터 주 1회(목요일) 연재로 변경됩니다. 더욱 깊이있고 정확한 내용을 전달해 드리기 위한 조치이오니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에 더 많은 기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노트르담의 신학
노트르담(Notre Dame)은 ‘우리들의 부인’이라는 의미로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며, 프랑스 각 도시마다 노트르담 성당들이 있기에, 한국인들이 많이 방문하는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은 ‘파리 노트르담’이라 불러야 정확하다.
프랑스에 있는 오래된 성당 어디를 방문해도 성당 정면에 최후 심판의 부조물을 볼 수 있다. 자세히 보면 마귀들이 저울을 아래로 당겨 심판의 저울을 움직여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장면이 있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십자가 + α(알파)이다. 그 알파는 인간의 정성과 노력이 추가되어야 하는 즉, 구원은 신인(神人) 협동(協同)으로 이루어짐”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신학에 의해 영세로부터 시작하여 죽어가면서 종부 성사로 인생을 끝내는 예식에 매이게 된다.
나아가 성지(聖地) 순례, 성자(聖者) 숭배와 성골(聖骨 성자들의 유골, 심지어 성자들의 유품까지) 숭배를 함으로써 죄를 사함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까지 나오게 된다. 이 성골 숭배 사상은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자, 지하에 숨어있던 신자들이 지하교회에 보관된 많은 순교자의 유골을 지상으로 가지고 나오면서 성골 숭배가 활발해진다. 처음에는 신앙의 선진들의 신앙을 보고 배우라는 의미에서 허용했던 것이, 나중에는 숭배로까지 연결되었고, 결국 성골을 보기 위한 ‘성지 순례’까지 유행하기 시작했다.
성지를 향해 가는 곳곳에 성인의 유골을 모신 바실리카를 만들어 순례객들의 방문을 유도하게 된다. 순례객들은 더 유명한 유골을 보유한 바실리카가 있는 경로를 여행 코스로 선택하게 되고, 교회는 성인들의 유해를 금, 은, 보석 등으로 장식하였다. 또 이 성골이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들로 많은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고, 교회들은 더 많은 성지 순례자를 유치하기 위해 더 많은 돈으로 성골을 구입하여 진열했다. 심지어는 동물의 뼈로 만든 가짜 성골도 나오게 된다.
개신교 역시 이런 오류에서 빠지지 않으려면 개신교 성지 탐방에서의 성지(聖地)는 ‘거룩한 땅’이라는 개념이 아닌, 성경에 나오는 지역으로서 성경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머물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허무신 ‘건물로서의 성전’ 개념까지 다시 등장하게 될 것이다. 깔뱅은 ‘거룩’이라는 개념이 차별과 구별의 의미로 악용(惡用)되고 있다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성직(聖職)의 개념도 깨뜨려 버렸다. 그래서 깔뱅(칼빈)은 좋은 전통도 끊임없이 성경의 가르침에 의해 교정되고 종속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당시 성전(聖殿)의 개념
베르사이유 궁전이 있는 땅은 루이 14세가 몰수하기 이전, 한 주교의 땅이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에게 몽 마르뜨르 언덕으로 불리는 이 땅도 한 여자 수도원장의 땅이었을 정도로, 당시 정치적 종교가들은 막강한 권력과 부를 소유하게 되고 방종과 부패한 삶을 살게 된다.
당시 대성당들이 ‘하나님의 큰 집’, ‘거룩한 전’으로 불렸던 것은, 사실은 주교가 자신의 막강한 세력을 증명하려는 목적의 힘겨루기 식 건축을 위한 헌금을 갹출의 방법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사도행전 7장 48절과 17장 24절에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사재(私財)와 헌금으로도 세울 수 없는 대형 건물 건축으로 경제의 파탄을 맞게 되자, 건물 완성을 위해 ‘면죄부 판매’라는 성경에도 없는 죄 사함의 해결책이 등장하게 된다. 종교가 돈만 있으면 천국도 살 수 있는, 가진 자들만의 종교로 변신한 것이다. 이런 당시 부패하고 혼란한 신학에 대항하여 바른 신학을 정립하고자 한 것이 바로 <기독교 강요>의 내용이다.
1534년 깔뱅, 엉굴렘으로 피신 - <기독교 강요> 초판 준비
온종일 자료를 찾다가 소중한 자료 하나를 발견했는데, 깔뱅(칼빈)이 머물렀던 친구 루이 듀 띠에(Louis du Tillet)의 집 사진이다. 엉굴렘(Angoulem)은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깔뱅이 머물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고, 알았더라도 자료가 없어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와서 한 장의 사진 촬영을 위해 자동차로 이동하기에는 너무 멀다. 450Km나 떨어져 있다.
그런데 깔뱅은 그 먼 거리를 걸어서 갔다. 최고의 학부에서 법 공부를 마친 바울 사도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았던(행 9:16) 것처럼, 학업을 다 끝마친 깔뱅도 그 동일한 길로 부름을 받았다. 즉 고난으로의 초대이다.
하지만 깔뱅의 길에 힘들고 먼 여정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거나, 깔뱅의 깔뱅됨을 위한 소중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파리에서도 그러했고, 오흘레앙에서도, 부르쥬에서도, 그리고 이곳 엉굴렘에서도 그러했다. 하나님은 그런 소중한 만남들을 미리 준비하시고, 만남들을 통하여 깔뱅을 오늘날 우리에게 귀한 영향을 끼치는 깔뱅으로 남게 하셨다.
1534년 깔뱅은 가명을 사용하면서까지 엉굴렘으로 도주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친구 루이의 집에 머물게 된다. 루이는 1502년-1503년 엉굴렘 지휘관과 시장(市長)으로, 프랑수와 1세 모친의 비서였던 엘리 듀 띠에(Hélie du Tillet)의 아들이었다. 또한 루이는 끌레(Claix)의 교구 주임 신부로 집에 교부들의 책을 비롯한 보기 드문 책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덕분에 깔뱅은 피신자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글 쓰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고, 이곳에서 바로 깔뱅의 대작 <기독교 강요> 초판을 준비하게 된다.
하지만 엉굴렘에 머물었던 깔뱅의 신변이 항상 안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깔뱅은 루이의 집 외에 Saint-Saturnin과 Claix, 그리고 동굴에서 돌 위에서 자면서 은신해야 했다. 기독교 강요의 많은 부분들은 동굴에 숨어 기록하였는데, 개혁 신앙의 정당함을 논증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있으나 전혀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신자들을 위한 내용을 저술하게 된다.
깔뱅은 또한 루이와 함께 있으면서 그곳의 사제들과도 교제를 하게 된다. 어떤 사제들은 깔뱅에게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참되고 순결한 지식의 맛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한 몇 편의 설교를 요구하기도 하여, 깔뱅은 설교를 기록해 전달하기도 했다.
깔뱅과 루이의 첫 만남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찾기 힘들지만, 깔뱅이 파리에 첫번째 머물면서 다녔던 두 학교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1523-1527).
깔뱅이 지나간 이후, 1560년경에 이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엉굴렘 근교인 Segonzac, Cognac, Saint-Même, Jarnac 등의 지역들은 종교 전쟁과 관련된 장소이다. 특히 자르낙(Jarnac)은 1569년 제3차 종교 전쟁 때 유명한 전투 지역이며, 앙리 4세의 숙부인 위그노 군 장군인 루이 드 꽁데가 전투에 패배하고 전사한 곳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