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어로 번역된 성경으로 구원 이해한 발도

류재광 기자  jgryoo@chtoday.co.kr   |  

[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15] 성경 번역이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 (2)

발도(1130년-1217년)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부유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Francesco d'Assisi, 1182년-1226년)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수도원에 다 바치고 가난한 수도승의 삶을 살았다. 그의 ‘평화의 기도’는 한때 개신교 신자들도 많이 불렀던 성가이기도 하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그 기도의 끝은 이렇다.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이 기도 속에 당시 가톨릭 교회의 신학인 ‘행위에 의한 구원’의 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오직 은혜(sola gratia)에 의한 구원

발도 역시 행위 구원의 신학적 가르침에 따라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줬지만, 여전히 영혼의 평화를 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성경을 아는 일에 몹시 갈급해했고, 마침내 두 사제들의 도움으로 라틴어 성경을 자신들의 일상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개인으로 처음 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발도는 성경을 읽으면서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고 오직 그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깨달은 그 복음을 혼자 간직할 수 없어 이웃들에게 전하기 시작했고, 그의 집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유숙하는 학교와 공공병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제자들을 훈련시켜 두 사람씩 길거리나 공공 장소에서 복음을 전하게 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회심하였다. 또한 발도는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려 했다.

발도는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인간의 죄성과, 오직 은혜로만 구원 얻을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당시의 신학적 오류에서 사람들이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복음 증거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였다.

그는 구원의 도리를 깨닫고 난 후 신자의 선한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단지 바뀐 것이 있다면 구원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서의 나눔에서, 이제는 구원 받은 자로서의 나눔과 가난한 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구원을 받거나 복을 받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헌신은 바른 헌신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구원의 도리를 깨달은 발도는 구원의 은혜로 나아가는 것에 걸림이 되는 로마 교회의 오류를 지적하기 시작했다. 면죄부 판매, 연옥 사상, 성자 숭배, 사제를 통한 죄 용서, 그리고 성인에 대한 기도 등이었다. 발도는 무엇보다도 성경과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프랑스 전역으로 펴져나갔고, 플랑드로와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헝가리, 폴란드 등 인근 국가로 전파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1194년 스페인의 알폰소 2세는 발도파를 숨겨주거나 음식을 주고 설교 듣는 자의 재산을 몰수한다는 칙령을 발표한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는 1229년에 뚤루즈 종교회의를 통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것과 평신도가 성경 사본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할 뿐 아니라, 이단으로 정죄받은 자의 모든 재산은 박탈하며, 영주 가운데 그의 영토 내에서 이단자를 제거하지 않은 사람은 파문하고, 1년 내로 이단자를 제거치 않으면 교황에 넘겨서 모든 영토를 박탈하여 교회 재산으로 환수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결국 발도파(Vaudois)들은 로마 교회로부터 출교를 당하고, 수만 명이 순교를 당하였으며, 박해를 피해 산과 동굴로 숨었다가 순교를 준비하며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았다.

가톨릭 교회의 한 문서에서 “베드로 캄비아노(Petrus Cambiano)는 이탈리아 북서부 삐에몬테(Piemonte)의 키에리(Chieri)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그 당시 북부 이탈리아를 거점으로 하는 소수의 이단들이 득실거렸는데, 베드로는 특히 발도파의 퇴치를 위하여 14년 동안이나 수고하였다. 1856년 교황 비오 9세 (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올라 성인의 반열에 들어섰다.”는 글을 보면서 이런 오류의 역사들이 다시 교회 안에서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을 생각해 보게 된다.

▲발도파들은 고도 2천-3천미터의 험한 산에서 신앙을 위해 숨어 지냈다.

▲발도파들은 고도 2천-3천미터의 험한 산에서 신앙을 위해 숨어 지냈다.


▲발도파들이 숨어 지냈던 한 장소인 메렝돌(Merindol) 지역 그 어디를 가도 작은 교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들의 신앙이 얀 후스(Jan Hus, 1367-1415)와 루터, 그리고 깔뱅의 종교 개혁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발도파들이 숨어 지냈던 한 장소인 메렝돌(Merindol) 지역 그 어디를 가도 작은 교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들의 신앙이 얀 후스(Jan Hus, 1367-1415)와 루터, 그리고 깔뱅의 종교 개혁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발도는 박해를 피해 삐까흐디(Picardie) 지방으로 피신하였다가 독일을 거쳐 보헤미아, 지금의 체코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얀 후스의 종교 개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발도파 그리스도인들은 1532년에 깔뱅의 개혁 신앙에 합류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깔뱅의 동역자이며 발도파의 활동 지역에서 멀지 않은 Gap 출신의 파렐(Guillaume Farel)이 1526년 발도파 성직자들에게 종교개혁 신학을 소개하는 교류의 중간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1532년에 파렐이 140명의 발도파 지도자들에게 개혁신앙을 설교하였으며, 이후 그들은 깔뱅의 영향을 받게 된다.

발도파는 1848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는 때까지 700년간 끊임없이 박해를 받으며 박해를 피해 동굴로 숨었다가 400여명이 발각되어 산 채로 동굴 안에서 화형을 당하기도 했으며, 1545년 뤼베롱에서는 약 3,000명에 달하는 발도파 신자들이 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발도를 비롯한 후예들은 당시의 신학을 그대로 수용하고 답습했다면, 이런 고통을 경험하지 않고 프란체스코처럼 존경받는 신앙인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 개혁자는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을 답습하려는 마음을 갖고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쉽지 않은 좁은 길이지만 진리와 생명의 길이기에, 그 길을 선택하고 그 길로 묵묵히 걸어가는 자만이 진정한 신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에도 뤼베롱 산맥(Le Luberon)이 있는 메렝돌(Merindol)을 가면 1545년 박해 때 완전히 파괴되긴 했지만, 신앙을 위해 깊은 산으로 피신하여 공동체를 이루며 말씀대로 살려 던 발도파(Vaudois)와 뤼베롱 지역 개신교의 역사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찾아 볼 수 있다

발도의 가르침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기 3세기 전에 이미 개혁의 기초를 놓게 되며, 루터와 얀 후스의 종교 개혁에 큰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성경 번역자들에게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일을 하였다. 그리고 그 후예들인 발도파들은 1532년에 성경 번역을 결정하고, 깔뱅의 사촌 형인 올리베떵에게 번역을 요청하게 된다.

오늘날 너무나 자연스럽게 배우고 이해하고 있는 “오직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이 구원의 도리는, 깔뱅보다 무려 380년 전에 화형이라는 극단적 순교에도 불구하고 간직하였던 가르침으로 마침내 깔뱅 시대에 신학으로 꽃을 피운 것이다.

에라스무스(Érasme, 1469년-1536년)와 루터

네덜란드 출신 에라스무스는 로테르담에 살면서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나 학자, 인쇄공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아 유럽 전 지역을 여행하였다. 그리고 그의 생애 가장 큰 업적은 헬라어 신약성경을 다섯 번(1516년, 1519년, 1522년, 1527년, 1535년) 번역하고 라틴어 번역을 출판한 것이다.

▲에라스무스 번역 성경.

▲에라스무스 번역 성경.


▲루터의 번역 성경.

▲루터의 번역 성경.

그는 1516년 바젤에서 헬라어 본문을 그가 알고 있던 새로운 라틴어로 번역 출판하게 된다. 이 번역은 유럽에서 모든 번역의 기반을 제공한다.

에라스무스는 그의 신악성경 서문에 “나는 모든 여인들이 복음서를 읽고 그리고 바울의 서신서를 읽을 수 있었으면……, 그리고 이 본문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되기를 소원한다”라고 기록했다. 이처럼 그는 성경이 특별한 전문가들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읽고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바로 평범한 대중들이 아니었습니까? …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화를 내실까요? 저는 농사꾼들을 물론이고 대장장이와 석공들, 심지어 창녀나 포주, 터키인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는 이상 저 역시 그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헬라어 신약성경을 다섯 번에 걸쳐 출판하게 된다. 이것은 이전의 라틴어 성경 <제롬 라틴 불가타>와 상반된 해석과 주석을 달고 있었기에, 천주교 내부에 많은 논란과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제롬 성경은 마태복음 4장 17절에 대하여 “고해성사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왔느니라”고 번역한 데 비해, 에라스무스는 “하늘의 왕국이 가까왔으므로 회개하라”고 번역하였다.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번역은 학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과 초대교회 당시 사도들이 설명한대로의 복음에 관심을 기울이게 했다.

그 제2판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독일어 번역의 대본으로 사용되었으며, 루터의 신구약 성경 출판은 신약 출판 이후 12년이나 걸렸다.

르페브르 신구약 성경 번역 완간(1530년)

▲ 느와용 깔뱅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르페브르 번역 성경.

▲ 느와용 깔뱅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르페브르 번역 성경.


르페브르는 모(Meaux) 교구의 설교자들을 돕기 위해 제롬의 라틴어판 불가타 성경을 기초로 하여 헬라어를 따라 수정한 신약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한다. 1525년에 출판된 이 번역 성경에는 52주 주일 설교를 위한 요점을 추가하였다.

도전적인 그 신학 정신은 당시 권력을 갖고 있던 지적인 집단(소르본느 대학; 가톨릭 신학의 본거지)들에게는 심각한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1526년 파리 의회는 저술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것을 금지시킨다. 그러나 르페브르는 1530년에 구약성경 번역을 완수하고 벨기에 앤트워프(Antwerpen)에서 첫 불어 번역 성경을 출판한다. 이 번역 성경은 벨기에 Louvain 대학 박사들의 승인을 받아 독일 황제 사흘르 깡(Charles Quint)의 권한으로 출판되고 있다.

올리베떵(Olivetan, 1535년)의 성경 번역

▲ 올리베떵 번역 성경.

▲ 올리베떵 번역 성경.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종교 개혁이 시작된 후 개신교인들은 성경 원래의 언어로 번역하기를 원하였다. 1532년 발도파 교회 회의에서는 개혁교회를 위한 성경 번역을 투표로 성경 번역이 시작되었으며, 프로젝트는 스위스 개혁자들과 공동으로 시작되었으며, 완벽한 번역을 위해 종교개혁자 깔뱅의 사촌인 올리베떵(Robert Olivétan)에 부탁을 한다. 올리베떵은 여러 번 정중히 거절하다가 1533년에서 번역을 시작하게 된다. 올리베떵 혼자서 이 작업을 했다면 2년 만에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어떤 책들은 발도 시대에 이미 번역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기초로 누락된 내용을 보완한다.

구약성경의 번역을 위해 올리베떵은 광범위한 자료를 사용함과 함께 자신만의 독창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계시록과 신약성경의 번역은 르페브르의 번역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올리베떵의 번역 성경에는 정경에 포함되지 않는 구약 외경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는 이 책들을 구약 정경의 끝부분에 두었고, 독자들에게 그 책들에 대한 개인적 관점을 밝히므로 혼동을 주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였다. 올리베떵의 수고로 마침내 원문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한 첫 책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신약 번역에 있어 사람들에게 빨리 성경을 갖도록 하기 위한 서두름으로 약간의 어색한 부분이 있다.

쥬네브(제네바) 성경(1546)과 벨기에 루방 성경(Louvain, 1550년)

올리베떵판은 제네바에서 신속하게 개정되는데, 1546년 출판된 성경에 쟝 깔뱅이 추가하여 1546년에 출판한다. 르페브르의 번역판은 벨기에 루방 대학 교수들의 수정으로 1550년에 새로운 버전이 나오게 된다. 1578년에 새로운 판은 지속적으로 사용되게 된다.

▲루방 성경.

▲루방 성경.

오늘날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성경책들은, 개혁시대에는 사제가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읽을 수도 없었던 책들이다. 그러나 성경을 구하여 읽으므로 개혁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역시 성경을 통해 쉬임 없이 스스로를 고쳐나가는 개혁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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