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임금 가운데 겸손해서 왕이 된 임금이 있다. 14대 선조이다. 선조는 왕이 될 수 없는 위치였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은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 소생으로, 중종의 9번째 아들이다. 게다가 선조(하성군)는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다. 그래서 서열상으로 볼 때 선조가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런 선조가 왕위에 오른 것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비화가 있다. 조선시대 13대 임금은 명종인데 명종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순회세자였는데 13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을 했다. 그래서 명종에게는 왕위를 이을 세자가 없었다.
어느 날 명종이 어린 조카들 즉, 왕손들을 불러 놓고는 임금이 정사를 돌볼 때 쓰는 익선관을 가리키며 “머리의 크고 작음을 알고 싶어서 그러니까 한 번씩 써 보거라” 했다. 모두들 좋아하며 한명씩 익선관을 썼다. 이제 가장 나이 어린 선조의 차례가 되었는데 선조는 쓰지 않고 공손히 받들어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함부로 쓸 수 있는 것이오리까?” 어린 아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까 명종은 깜짝 놀랐다. ‘이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구나. 선조를 후계자로 삼아야겠구나.’ 작정을 하게 된다. 그때부터 선조를 자주 대궐로 불러들여 이야기를 나누며 총애하였다. 그런 몇 년 후, 명종이 34세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다. 누구를 왕으로 세워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을 때, 선조를 왕으로 세우려는 남편인 명종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인순왕후가 선조를 왕으로 세운다는 교서를 내렸다. 임금만이 쓸 수 있는 익선관을 자신이 어떻게 쓸 수 있겠느냐는 겸손함을 보고, 명종은 선조에게 진짜 면류관을 씌워 준 것이다. 겸손하면 세상에서도 이렇게 높은 자리에 앉게 된다. 반대로 교만하면 패망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약 4:6; 벧전 5:5).
인간은 본질적으로 교만하다. 교만은 그 사람의 신분이나 업적과 상관이 없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그 인격 속에 교만이 숨어 있고,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라도 그 신앙 속에 교만이 숨어 있다. 조금만 방심하고 우쭐하게 되면 내면에 숨어있던 교만이 소리 없이 그 사람을 덮어버린다. 그래서 교만이 무서운 것이다. 20세기 위대한 복음전도자인 빌리 그래함 목사는 교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교만이란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보다 더 높게 보는 것이다.” 그렇다. 교만한 사람은 성경을 단순히 참고서 정도로 생각한다. 진리의 절대적 기준이며 삶의 유일무이한 좌표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교만이란 일종의 신앙의 천동설이라고 할 수 있다. 천동설의 핵심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를 보는 것이다. 지구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이해한다. 신앙의 천동설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맞추고 살아가야 하는데 내 중심으로 살아간다.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기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의 삶을 가꿔 가시는지 보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역사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예수님을 보라.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다.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셨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부활의 영광과 함께,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기고 하나님께서 나의 왕 되심을 인정할 때, 존귀한 축복을 주시고 온 세상을 다스릴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주신다. 겸손함을 통해서 우리가 왕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