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종교개혁자 토머스 크랜머가 떠오른다
16세기 프로테스탄트의 불모지 영국에서 희생으로 종교개혁의 기초를 닦은 교회 지도자 토머스 크랜머는 1489년 영국 노팅엄셔주 애슬랙턴에서 가난한 자작농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는 14세 때 부모의 권유로 케임브리지에 위치한 예수대학으로 유학가서 1511년 그 학교의 명예 교우가 된다. 매우 조용한 성격을 지닌 크랜머는 그곳에서 교회에 대한 새로운 개혁을 갈구하는 수많은 학자들과 학문적으로 깊이있게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학자 크랜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행복과 만족을 누리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1533년 당시 영국의 국왕인 헨리 8세(1509-1547)의 급작스런 부름을 통해 켄터베리로 이주하면서 예상치 않는 역동적 개혁주의자로 변신한다. 크랜머는 켄터베리의 대주교로 즉시 임명돼 헨리 8세와 사이가 좋지 않은 캐서린 왕비가 이혼할 수 있도록 적극 돕는다. 헨리 8세 부부를 위해 교황에게 이혼 청원서를 제출해 이를 성사시킨 것이다.
헨리 8세의 지시대로 크랜머는 1533년 헨리 8세와 캐서린 왕비의 결혼을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이미 임신 중이었던 앤을 새로운 왕비로 맞이하도록 적극 도왔다. 또 당시 교회와 교황의 보편적인 생각과는 달리 “경건한 국왕은 교회 및 교황 위에 있다”는 왕권 우월사상을 주장, 헨리 8세의 신임을 크게 얻는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조용했던 크랜머는 영국 왕실과 국가에 큰 영향력을 가진 ‘소리나는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헨리 8세가 죽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헨리 8세의 3번째 아내인 제인 시모가 낳은 외아들)가 왕으로 즉위하자, 사회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어린 왕 에드워드의 후견인 서머싯의 공작 에드워드 시모는 처음부터 영국의 국교회를 프로테스탄트로 바꾸려는 개혁적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올바른 개혁주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에드워드 6세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신뢰했던 토머스 크랜머를 교리 작업을 위한 위원회의 감독으로 발탁한다.
국왕의 강력한 후광을 업은 크랜머는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한 설교집(Book of Homilies)을 1547년 펴냈고, 1549년에는 온건 프로테스탄트 성향을 지닌 영어 기도서(A)를, 1552년에는 매우 강력하고 분명한 프로테스탄트적 영어 기도서(B)를 발간한다.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한 영국 국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기 위해 42개조로 된 교리 진술서를 제정, 왕으로 하여금 만방에 공포할 수 있도록 했다. 영국 내 모든 성직자, 교수 및 학위 취득을 원하는 신청자들은 예외없이 42개조로 된 ‘크랜머 교리 진술서’를 읽고 서명하도록 법규화했다.
그는 또 프로테스탄트로 전환한 영국 국교회의 바른 질서를 위해 필요한 교회법 개정안을 만들었다. 1571년 이를 정리해 ‘교회법 개정(Reformatio Legum Ecclesiasticarum)’이라는 타이틀로 정식 출판했다. 또 탁월한 법률적 지식과 세련된 개혁주의 신학을 기초로 영국 국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프로테스탄트적 일반 전례서가 완성됐다. 그가 만든 전례서는 성직자의 결혼 허용, 성지순례 금지, 성상에 돈이나 양초를 바치는 것 금지, 염주알을 굴리며 기도하는 것 금지, 불필요한 성일과 성상 및 유물 남용 금지 등을 담고 있었다.
또 당시 카톨릭 교회가 주장한 성찬의 화체설을 부정하고, 개혁주의자들이 믿었던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다. 사제들만 참여할 수 있었던 성체분리 의식을 모든 성도들에게로 확대했다. 위와 같은 역동적인 종교개혁은 오늘날 영국 성공회의 기반을 바르게 세우는 데 충분한 역할을 했다. 크랜머에 의해 어수선한 영국 교회법이 정비되고, 교회 발전을 위한 중요한 토대가 마련됐다. 뿐만 아니라 국가 발전을 위한 행정개혁안이 그를 통해 마련되기도 했다. 그의 종교개혁 사상이 국가의 정치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그의 역동적인 개혁으로 카톨릭적이었던 영국의 법과 사회가 프로테스탄트적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자 에드워드 6세를 이어 정권을 잡은 메리 1세의 카톨릭 반동정책으로 크랜머는 1556년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매우 안타까울 정도의 화형에 처해진다. 그는 “주 예수여, 제 영혼을 받으소서” 라고 크게 기도하면서 화형을 당당하게 받아들였다.
비록 화형을 당했지만, 16세기 크랜머를 통해 영국 교회와 국가에 일어난 새로운 개혁의 바람은 영국의 발전을 100년이나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그의 순교가 영국의 정치와 경제, 사회, 그리고 종교 발전을 앞당기는 지대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얼마 전 인동초의 별명을 지닌 대한민국 15대 김대중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이명박 정부의 전격 허락으로 그간 전직 대통령들의 장례식 관례를 깨고 국장이 치뤄졌다. 故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세기 군부에 의해 지배되던 비참한 철권 독재국가를 민주국가로 바꾸는데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지도자로 인정됐기 때문이다. 국민장이 아닌 국장으로 장례를 치른다고 그의 가문에 대단한 유익이나 고인의 명예가 높이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장례가 국장으로 치러진 것은 지난날 국가와 민족 공동체를 군부 독재에서 구하려 했던 그의 희생이 인정된 때문이다.
크랜머가 국가와 교회 개혁에 몸 바쳐 헌신해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들 뇌리에 잊혀지지 않는 것처럼,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지도자들의 역할과 이름은 영원히 역사 속에 남게 된다. 자신이 아닌 공동체를 위해 전적으로 희생하며 몸을 바칠 국가와 교회의 지도자가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