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19] 깔뱅의 결혼과 그의 가정
깔뱅이 스트라스부르에서 두번째로 머문 3년(1538년-1541년)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쥬네브(제네바) 사역의 아픔을 위로하시고 목회와 신학에 대한 새로운 자세를 갖게 하셔서 더욱 성숙하게 만드신 시간이었을 뿐 아니라, 삶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간을 갖게 하신 시간이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안착한 깔뱅은 가끔 성 니꼴라 교회에서 설교를 했고, 쟝 스트럼이 만든 학교 짐나스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피난온 400명의 위그노를 위한 예배를 성 마들렌 교회에서 인도하였다. 훗날 현재 부클리에 교회로 장소를 옮기게 되며, 부클리에 교회는 외국 땅에서 세워지긴 했으나 프랑스인을 위한 최초의 교회가 된다. 1546년에 프랑스에서 첫번째로 세워지는 모(meaux) 교회는 깔뱅이 목회했던 위그노 교회를 그 모델로 하였다.
당시 깔뱅은 참사원의 넓은 집에 살고 있었기에, 함께 거주하는 사람들과 방문객들이 많았었다. 부쳐는 이들을 좀더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가정이 필요하다며, 깔뱅에게 결혼을 독려하고 여인을 찾아보라고 재촉했다. 깔뱅 역시 부쳐의 가정을 통해 목회자에게 있어서 결혼을 통한 심리적, 정서적 안정이 중요하다는 점을 잘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깔뱅은 결혼에 대하여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한 편지에서 깔뱅의 결혼에 대한 견해를 볼 수 있는데, 그는 “사제들의 독신 생활에 대해 적극 반대했던 나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 앞으로 결혼할지 모르겠다. 만약에 결혼하게 된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에게 영광을 위함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던 깔뱅이 결혼하게 된 데에는 부쳐 부부와 파렐의 영향이 컸다. 부쳐는 개혁자들이 가톨릭과의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동료 개혁자들인 까삐토와 깔뱅에게 결혼을 강력히 권하였다. 그 결과 까삐토는 빌리브항디(Vilibrandis Rosenblatt, 1504-1564)와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쯔빙글리의 후계자인 오콜람파디우스(Johannes Oecolampadius, 1482년-1531년)와 결혼하였다가 사별한 과부였다.
1522년 종교 개혁자 가운데 사제로서 가장 먼저 결혼한 마틴 부처의 부인은 수녀 출신의 엘리자베스(Elizabeth Silverstein)였다. 그들은 매우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 결혼 전 신변의 어려움을 받고 스트라스부르로 피신했었던 엘리자베스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피신해온 신자들을 아주 극진히 돌보았다. 부쳐는 슬하에 13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1541년의 흑사병으로 인해 한 명만 생존하였다. 부쳐의 부인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시하고, 개혁자 까삐토의 죽음으로 다시 과부가 된 빌리브항디을 불러 자기 남편 마틴 부쳐와 결혼할 것을 간절히 부탁해 재혼하게 한다.
부쳐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빌리브항디는 네 명의 종교개혁자들의 아내로 유명하며, ‘종교개혁의 과부 메리’라고 불리기도 했다. 먼저 그녀는 1526년 22세의 나이로 인문주의자 루드빅 켈러(Ludwig Keller)와 2년의 결혼 생활에 한 자녀를 두었다. 그녀의 두번째 남편은 나이가 많고 건강치 못했던 오콜람파디우스로, 1531년에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세 자녀를 더 두었다. 세번째 남편은 까삐토(Wolfgang Capito(1478년-1541년)로, 5명의 자녀를 더 낳았다.
그리고 마지막 남편은 마틴 부쳐(1491년-1551년)이다. 두 사람 사이에 1명의 자녀를 낳았고 한 명을 양자로 입양했다. 하지만 부쳐가 1549년에 영국으로 망명의 생활 중 죽어 그녀는 다시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가족들과 함께 바젤로 갔다가, 흑사병으로 1564년에 죽어 그곳에서 두번째 남편 곁에 묻히게 된다.
한편 깔뱅은 1540년 8월 파렐과 엘리자베스의 소개로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미망인이었던 이들레뜨 드 뷰흐(Idelette de Bure)와 결혼한다. 이들레뜨는 1533년 리에즈(Liège)에서 이단 문제에 연관되어 공개적 사죄를 강요받자, 그의 동생 랑베흐(Lambert)와 함께 탈출하여 스트라스부르에서 깔뱅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리에즈의 재세례파 목사인 쟝 스또흐데(Jean Stordeur)와 결혼했었고, 스또흐데 사이에 아들과 딸을 두고 있었다.
과거 스또흐데 부부는 깔뱅의 설교에 매료가 되었고, 그의 종교적 교리들을 수용하였다. 깔뱅은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들의 집에 종종 머물기도 했다. 하지만 스또흐데는 페스트로 죽게 되고, 이들레뜨는 깔뱅의 집에서 병자들을 돌보며 식사를 준비하는 깔뱅을 도와주었다.
여전히 독신으로 있는 깔뱅을 동료 개혁자들이 꾸짖자, 결혼보다 독신을 선호했던 깔뱅은 “겸손하고, 남들을 잘 돌보며, 절대 거만하지 않으며, 절대로 상식을 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며, 인내심이 있으며 그리고 내 건강에 염려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 소개해 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동료 개혁자들 중 누구도 이들레뜨의 침착함과 겸손한 자질을 알고 있지 못하였다.
당시 깔뱅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심한 두통으로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든 상태에 있었고, 피를 토하기도 했으며 신장 결석과 방광으로도 고생을 하고 있었다.
깔뱅은 엉굴렘의 부유한 친구 띠에(Louis du Tillet)가 제의한 경제적 도움을 거절하였다. 그는 1주일에 1 florin(화폐 단위)이라는 아주 적은 돈을 벌었기에, 부쳐 목사 집에서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Jean Strum이 성당 전속 신부에게 주는 아주 작은 봉급을 마련해 주어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결국 깔뱅은 주변의 소개로 1540년 초에 31살의 나이로 결혼하게 되는데, 마침 부쳐 목사가 보름스를 방문 중이던 터라 파렐이 뉴사텔에서 와서 대신 주례를 하였다.
깔뱅이 이들레뜨의 매력에 대해 “겸손하고 친절했으며, 악의가 없었고, 알뜰하며, 참을성이 있고 나의 건강을 돌봐줄 만한 점이었다”고 했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은 1541년 9월에 깔뱅이 쥬네브로부터 다시 초청을 받게 되자, 이들레뜨는 자기 딸 쥬디뜨(Judith)과 함께 깔뱅을 따라 쥬네브의 rue des Chanoines(현재 rue Calvin)에 있는 집에 거주하게 된다. 이들레뜨의 아들은 쥬네브로 함께 가지 않고, 삼촌 랑베흐의 집에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1706년에 허물어지고 다른 용도의 건물이 들어서게 된다.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해야 하지만, 남자도 여자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깔뱅의 가르침을 통해, 여성을 존중하는 그의 가정관을 엿볼 수 있지만, 이들레뜨는 남편 깔뱅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저술과 모임으로 항상 바빴던 깔뱅은 아주 짧은 시간도 그의 부인을 위해 낼 수 없었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이들레뜨는 1542년 2월에 아들 Jacques를 출산하지만, 허약하게 태어난 아이는 단 2주 만에 사망했다. 당시 깔뱅의 아픈 마음을 글로 표현하기도 했다. 1543년 7월에 이들레뜨는 딸을 출산하며, 1544년 5월 30일에 아들을 또 낳지만, 이 아이들 역시 오래 살지는 못했다.
출산 이후 이들레뜨는 건강이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지만, 쥬네브에서 병자와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매우 활동적이었다. 모든 상황들은 혼자 감당하기에는 심각한 것들이었지만, 그녀는 목회와 저술로 바쁜 남편 깔뱅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단 한 번도 자신의 문제와 걱정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1549년 4월 2일에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깔뱅은 친구 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내 아내의 죽음은 나를 몹시 힘들게 하였지만, 슬픔을 견디며 지내고 있다. … 너는 내 감정이 얼마나 약한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강력한 자제력이 없었다면 오늘까지 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의 고통은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완벽한 동반자를 잃었다. 그녀는 고난 가운데서도, 피난과 가난함에도 자발적으로, 그것도 죽을 때까지 나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그녀는 모든 삶 동안 나의 사역을 도운 신실한 동역자였다. 나는 그녀로 인해 아주 작은 방해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병들어 있었지만 자신을 전혀 염려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이들을 염려하였으며, 나를 힘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 어떤 도움도 요청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그녀가 죽기 2, 3일 전에 조심스럽게 그녀의 아이들에 대한 의무를 결코 소홀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자 그녀는 즉시 ‘나는 이미 그들을 하나님께 맡겼답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그들을 잘 돌볼 것이라 말했을 때, 그녀는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위탁하신 일들을 절대 간과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얼마 전, 내가 내 자녀들을 돌보는 것에 대하여 한 부인과 나눈 대화를 아내에게 이야기했을 때,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원칙적으로 그들 스스로가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자녀들이 완전하며, 하나님을 두려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 때문에 내 남편에게 압력을 넣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들이 경건한 삶을 산다면, 그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라고……. 이런 마음의 대범함은 백 마디의 조언보다도 나에게 가치 있는 것이었다.”
아내가 죽은지 3개월 뒤, 마틴 부쳐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반쪽밖에 살고 있지 않다는 표현을 통해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1550년 데살로니가 주석을 자신의 아내를 성의껏 치료했던 의사 브네 떽스또(Benait Textor)에게 헌정하였다.
아내의 죽음으로 받았던 충격은, 그로 하여금 살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잘 이해하며 위로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되게 하였다.
쥬디뜨는 1554년 레오나드 마젤(Léonard Mazel)과 결혼하여 쟝(Jean)이라는 아들을 갖게 되고, 1557년 11월 29일에 깔뱅으로부터 유아 세례를 받게 된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