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20] 종교 개혁 당시 교회의 모습 1
몇 주에 걸쳐 프랑스 종교 개혁 당시 교회의 모습과 역사를 살펴보면서, 종교 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상황과 동시에 당시 왕들과 가톨릭 교회가 개혁자들을 박해했던 그 역사적 배경들을 알아보고자 한다.
이는 단순히 당시 교회와 권력적 종교인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현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개신교회들이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기회를 삼아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자들의 정신을 잃지 않을 뿐 아니라, 실추된 교회의 참된 위상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프랑스 교회사 학자인 Charles Bost가 소개하는 1500년경의 교회의 상황들을 살펴보자.
1) 교회
14, 15세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이 아닌 가톨릭 교회 자체를 믿었고, 특히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신앙으로 생각하였다. 교회는 이미 복음의 자리를 대신 하였다. 성경은 교회에 의해 설명된 단편적 가르침과 평신도들이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로 되었기에 성경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일반 교인들과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연옥에서 구원할 수 있으며 죄를 사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권세를 가진 특권자로 변신되어 버렸다. 또한 교회와 교황은 무오하며, 무오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단으로 정죄받아야 했다.
이에 대해 루터는 “교회 회의가 오류를 범할 수 있듯이, 교황도 잘못할 수 있다. 교황이 교회를 대신한다면, 저 추잡한 교황의 행위들은 교회의 행위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라 하였다. 깔뱅 역시 교회가 아닌 성경만이 교회의 유일한 권위임을 주장하였고, 교황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전적 타락(이 단어를 깔뱅이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고, 1619년 도르트 회의에서 채택된 단어임)’의 내용을 주장할 뿐 아니라,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별이 없는 ‘만인 제사장’을 주장하므로 당시 교리를 반박하였다.
2) 성직자들
로마의 교회는 사치스러운 궁전과 같았고, 교황들은 너무나 자주 불미스러운 행동들로 지탄을 받곤했다. 교회의 고위층 성직자들인 대주교, 주교, 사제들은 무식하였고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반면 지방 성직자들은 가난하여 비참하게 생활하였다.
3) 수도사
당시 수도원에는 많은 수도사들로 넘쳐 나고 있었다.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어릴적부터 자의든 타의든 인생 전체를 그곳에서 갇혀 보내야만 했었고, 많은 이들이 게으름 속에서 탐욕과 방탕함 속에 살았다.
4. 종교적 미신
신자들은 대단히 경건하였지만, 그들의 신앙은 외적이며 미신적 예식으로 대신하였다. 미사(제사 의식) 제도 속에서 정작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다. 사제 출신 개혁자 파렐은 “나는 성직자들의 손에 있는 성체를 오래 동안 믿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진실한 하나님은 주고받아 먹는 분으로 갇혀 계셨으며, 하늘과 땅 그 어디에도 계시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당시, 성모(聖母)와 성인(聖人) 숭배, 성상(聖像)들을 통해 죄가 사하여진다는 가르침은 우상 숭배이며, 죽은 성인의 뼈나 유물을 섬기는 성골 숭배는 너무나 잘못된 가르침이었다. 나아가 당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죄 용서는 연옥에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교황이 판매하는 면죄부를 돈으로 구입할 때만 가능했다. 그러나 깔뱅은 이런 신학적 모순에 반박하여, 인간의 공로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에 의한 죄 용서와 구원을 주장하게 된다.
이러한 교회의 부패 속에 리옹(Lyon)의 발도(Valdo), 영국의 사제였던 위클리프(Wycliffe), 보헤미야의 사제 얀 후스와 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연구하면서 교회 가르침의 오류를 깨닫고 가르쳤지만 발도파들은 마녀처럼 화형으로 죽어갔고, 위클리프의 시신은 불태워졌다. 하지만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지켜진 그들의 가르침은, 마침내 루터를 비롯한 프랑스의 사제 출신 신학자들에 의해 더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 당시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누가 부정할 수 있으랴?
몇백년이 지난 이후, 한 역사가는 현재 한국 개신교를 이렇게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1) 면죄부 대신 축복권이 남발.
세례요한과 사도들은 복음증거를 통해 신자들을 주님께로 데려다 주는 중매자서의 역할을 했다(고후11:2). 하지만 중세 교회는 죄 용서를 빌미로 신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닌 교회의 제도 속에 머물게 하며 헌금과 교회의 권위에 복종을 요구하였다면, 당시 한국 교회의 일부 목회자들 역시 신자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복(福)을 빌미로 중세 교인들에게 요구했던 그 동일한 헌신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교인들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든 관심이 없었고, 많은 헌금을 내며 교회에만 충성하는 신자로 머물게 하므로 사회로부터 지탄 받는 신자들이 많았었다.
특히 '상급의 차등 사상'에 대한 곡해로, 은혜에 대한 감사로 주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었다. 헌신의 진짜 이유는 현세에서는 물론이며 죽어서라도 다른 사람과 차별된 복을 받아 천국에서도 부유한 자로 살겠다는 욕망으로 가득찬 신앙생활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신자 자신이 복 받는 것과 관련되지 않은 일들에는 침묵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적 신앙관을 갖게 하였다.
2) 신학교
복음에 빚진자로 어려운 가운데 신학을 공부하는 신실한 신학생들도 많았지만, 소명과 상관없이 생존을 위한 직업적 선택으로 온 이들도 많았었다. 신학교에서 인기 있는 과목은 말씀 연구와 관련된 학과보다는 '교회 성장학'이라는 교회 경영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3) 성전 건축
예수님께서 돌로 된 성전(聖殿)은 친히 허무시고 사람 성전 짓는 일을 부탁하셨음에도, 그 당시 한국 교회는 ‘성전 건축’이라는 미명하에 암울했던 중세 시대를 향하여 자꾸 역류(逆流)하고 있었다. 개혁자들이 비판하고 나왔던 과거의 그 오류 속으로 회귀(回歸) 하려 함으로 오늘날에는 거대한 교회당들이 텅텅 비어 국가에서 관리해야만 하는 슬픈 현실을 보게 된다.
성전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한 곳’ 뿐이었고, 제사장도 하나님이 지정하신 아론의 후손들에 의해 피 제사를 드려야만 했으며, 그 성전 역시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으로 완성되어 지상과 천상 그 어떤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21:22)
이런 무지로 인해 당시 각 교회들은, 성전 짓기에 전념하므로 너무나도 많은 큰 성전들이 있었다. 건물 자체가 거룩하여 성전인지, 피제사를 드렸기에 성전인지... 지금까지도 미스테리이다. 중세시대에 '거룩'을 오용하여 자신들의 탐욕을 위한 전쟁에도 성전(聖戰)을 갖다 붙혔던 그 오류를, 당시 한국 교회는 보란듯이 버젓이 흉내를 내었다.
4) 성경에 대한 무지
교회가 감당해야 할 지상명령(至上命令)은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그 당시 목회자의 가장 큰 관심은 ‘교회 성장’으로 인한 대형 교회였다. 가장 인기 있는 성경 공부는 교회 성장과 관련된 것으로, 그 책의 저자들 대부분은 성공했다고 인정받은 대형 교회 목사들이었다. 이런 경향으로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교회와 목회자의 권위에 복종하는 제자들을 만들기에 혈안이었다. 그 결과 제자는 많으나 주님의 제자는 없었으며, 교회마다 성경 공부는 많았지만, 말씀은 수단이며 목적은 성장에 있기에 정작 하나님과 성경에 대하여 무지하였다. 그래서 당시 교인들은 그저 땅에서 물질과 건강, 자녀와 출세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미신적 요소들이 많았었다.
당시 한국 교회의 중세화(中世化) 회귀의 경향으로 결국 성경적 세계관의 결핍으로 자신의 복과 자신의 소속된 교회의 부흥만을 생각하는 근시안적 시각을 가진 다수의 목회자와 신자들로 인해 교회의 진정한 권위는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런 가상의 역사가 가상으로 끝나기를 바라며, 한국 교회가 하나님과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가톨릭 교회의 한 논문 가운데 다음과 같은 자성의 글을 보면서,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바른 방향을 위한 자성 뿐 아니라, 신학자들의 교회를 향한 루터와 같은 용기 있는 바른 외침이 목마름처럼 갈급하다.
“가톨릭 내의 전통보수주의자들은 성서와 성전,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마리아, 성인공경, 교황의 무류지권, 칠성사 등에 대한 신앙을 고수하면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변화된 교회의 변혁들에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트리덴틴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들은 시대가 변해도 절대로 변화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톨릭내의 이러한 보수전통주의자들은 교회가 변화하는 사회 속에 적응되고 현대화되어야 하는 과제를 망각하고, 어떤 의미에서 세상과 동떨어져 밖의 세상과는 관심 없이 자기식의 신앙 활동만 하고, 자기만 구원되면 된다는 경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라틴어 미사가 모국어 미사로 허용된 것까지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현대의 발전하고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적응해야 하며, 다양한 문화권 내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토착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과거에 그리스도교회가 정치적, 종교적 세력을 갖고 있을 땐 그 절대성을 고수할 수 있었으나 요즘처럼, 과학주의, 합리주의, 이성주의적 사고에 기반을 둔 현대인들에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제공한다는 것은 이 시대의 그리스도교가 안고 있는 큰 과제이기도 하다. ”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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