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와 1세의 시대적 상황과 개혁자들

류재광 기자  jgryoo@chtoday.co.kr   |  

[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21] 종교 개혁 당시 교회의 모습 2

1) 행운아 프랑수와 1세

프랑수와의 어머니 루이즈(Louise de Savoie 1476-1531)는 프랑수와가 두 살 때 19세의 나이로 과부가 되어 아들 사랑에 극진하였고, 두 살 위인 누이 마흐규리트(1492년-1549년)도 동생에 대하여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프랑수와 1세(François I, 1494년-1547년)의 수호 성인인 세례 요한의 모습으로 그를 그린 그림. 그 옆의 앵무새는 ‘웅변의 상징’으로 설교가처럼 말을 잘했던 프랑수와를 묘사하며, 또한 앵무새는 황제들에게 Ave(아베)라고 늘 인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Ave는 극히 높은 사람에게 인사할 때 사용되는 인사로 프랑수와 자신이 황제임을 묘사한 그림이다. 프랑수와는 1515년 마리냥(Marignan)전투에서 승리한 후, 자신을 로마 황제가 부활한 것처럼 나타내고 싶어했고, 결국 1519년에 로마 황제 선출에 출마한다. 세례 요한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삶을 살았는데, 정작 그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프랑수와 1세(François I, 1494년-1547년)의 수호 성인인 세례 요한의 모습으로 그를 그린 그림. 그 옆의 앵무새는 ‘웅변의 상징’으로 설교가처럼 말을 잘했던 프랑수와를 묘사하며, 또한 앵무새는 황제들에게 Ave(아베)라고 늘 인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Ave는 극히 높은 사람에게 인사할 때 사용되는 인사로 프랑수와 자신이 황제임을 묘사한 그림이다. 프랑수와는 1515년 마리냥(Marignan)전투에서 승리한 후, 자신을 로마 황제가 부활한 것처럼 나타내고 싶어했고, 결국 1519년에 로마 황제 선출에 출마한다. 세례 요한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삶을 살았는데, 정작 그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당시 왕이었던 루이 12세는 자신의 왕권을 이을 아들이 없어, 1515년에 나이 어린 사촌 프랑수와에게 자신의 딸 끌로드(Claude de France 1499-1524)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왕위를 물려준다. 왕위(王位)와 거리 멀던 프랑수와로 인하여 왕권이 발루와 오를레앙(Valois Orleans) 가문에서 발루와 엉굴렘(Valois Angouleme)으로 옮겨지게 된다.

20세에 왕이 된 프랑수와는 이탈리아 침략을 통하여 르네상스와 인문주의를 도입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당시 르네상스가 ‘인문주의’라는 지적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다수의 학자들이 중요한 서적과 필사본을 갖고 이탈리아로 피신해왔기 때문이다.

프랑수와가 초기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자들에 대하여 큰 반감을 갖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기도 하였던 것은, 그의 누이 뿐 아니라 프랑수와 자신이 인문주의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오나도 다 빈치, 라파엘로와 같은 대가들의 명작을 수집하거나 또 예술품들을 강탈함으로써 프랑스 예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프랑스가 오늘날 예술의 나라가 됨에 일조(一助)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 건축물들에 대한 동경으로, 유명 건축가들을 초청하여 엉부와즈(Amboise) 성과 샹보흐(Chambord) 성을 비롯한 많은 성들을 짓거나 재건한다.

▲프랑수와가 이탈리아에서 강탈한 Véronèse의 ‘가나 혼인 잔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그림 중 크기로는 제일 압도적이다.

▲프랑수와가 이탈리아에서 강탈한 Véronèse의 ‘가나 혼인 잔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그림 중 크기로는 제일 압도적이다.

▲베로네즈는 프랑수와(왼쪽 세번째)를 신부의 가슴과 신부의 결혼 예물을 훔쳐보는 파렴치범으로 묘사함을 통해, 이탈리아를 훔쳐보고 침공한 침략자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프랑수와의 보물을 훔쳐다 보는 여인의 시선 역시 흥미롭다.

▲베로네즈는 프랑수와(왼쪽 세번째)를 신부의 가슴과 신부의 결혼 예물을 훔쳐보는 파렴치범으로 묘사함을 통해, 이탈리아를 훔쳐보고 침공한 침략자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프랑수와의 보물을 훔쳐다 보는 여인의 시선 역시 흥미롭다.

▲프랑수와의 대표적 건축물인 샹보흐 성. 이탈리아 양식 건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했다는 설이 있다.

▲프랑수와의 대표적 건축물인 샹보흐 성. 이탈리아 양식 건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했다는 설이 있다.

▲프랑스 내 어떤 고성을 방문해도 쉽게 볼 수 있는 프랑수와의 문장(紋章)은 건축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 보여준다.

▲프랑스 내 어떤 고성을 방문해도 쉽게 볼 수 있는 프랑수와의 문장(紋章)은 건축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 보여준다.

▲퐁텐불루 성. 성 루이 때 수도원으로 세워진 건물이었다가, 프랑수와 1세가 왕궁 부속 건물로 재건축한 건물. 말발굽 모양의 계단은 루이 13세 때 위그노 건축가 Jean du Cerceau의 작품이다. 이곳은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 한 후 잠시 머물다가 다시 체포되어 자신의 근위병들의 사열 속에서 이별을 고한 장소이기에 ‘이별(Adieu)의 광장’ 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퐁텐불루 성. 성 루이 때 수도원으로 세워진 건물이었다가, 프랑수와 1세가 왕궁 부속 건물로 재건축한 건물. 말발굽 모양의 계단은 루이 13세 때 위그노 건축가 Jean du Cerceau의 작품이다. 이곳은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 한 후 잠시 머물다가 다시 체포되어 자신의 근위병들의 사열 속에서 이별을 고한 장소이기에 ‘이별(Adieu)의 광장’ 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프랑스로 초청하여 자신의 엉부와즈 궁전 인근에 끌로 뤼세(le clos Lucé ) 성에 거주하게 하여 예술과 과학 발전에 기여하게 한다.

아래 사진들은 종교 개혁과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다음에 연재하게 될 엉부와즈 위그노 학살과 관련된 곳이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게재한다.

▲다 빈치가 살았던 성 끌로 뤼세(le clos Lucé ) 성.

▲다 빈치가 살았던 성 끌로 뤼세(le clos Lucé ) 성.

▲다 빈치의 숙소에서 바라 본 왕궁. 사진 왼쪽 작은 성당에 다 빈치 무덤이 있다.

▲다 빈치의 숙소에서 바라 본 왕궁. 사진 왼쪽 작은 성당에 다 빈치 무덤이 있다.

▲끌로 뤼세 성(le clos Lucé)과 엉부와즈 성과 연결된 지하통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지하통로를 통해 자유롭게 만났다고 한다.

▲끌로 뤼세 성(le clos Lucé)과 엉부와즈 성과 연결된 지하통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지하통로를 통해 자유롭게 만났다고 한다.

▲작은 성당 안에 있는 다빈치의 무덤.

▲작은 성당 안에 있는 다빈치의 무덤.

▲쁘띠 빨레에 전시되어 있는 다 빈치가 프랑수와의 품에 안겨 운명하는 장면은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우정을 볼 수 있다.

▲쁘띠 빨레에 전시되어 있는 다 빈치가 프랑수와의 품에 안겨 운명하는 장면은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우정을 볼 수 있다.

▲다 빈치가 자신의 숙소에서 마지막 숨졌던 침대(박물관의 허락을 받고 촬영한 사진).

▲다 빈치가 자신의 숙소에서 마지막 숨졌던 침대(박물관의 허락을 받고 촬영한 사진).

2) 카를 5세와의 갈등

선왕(先王)인 루이 12세는 카를 5세에게 조공을 바쳤던 굴욕적 관계였고, 카를 5세는 프랑스의 영토인 부르고뉴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프랑수와는 카를 5세를 좋게 생각할 리 없었다.

왕권 강화를 통해 유럽 진출을 꿈꾸던 프랑수와는 1519년에 막시밀리안 1세가 죽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에 출마한다. 하지만 푸거(Fugger) 가(家)의 자금 지원으로 막대한 뇌물을 뿌린 합스부르가(Habsbourg)의 카를 5세(Karl V, 스페인 카를로스 1세, 1500~1558)에게 패배한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외가(外家)를 통해 스페인을, 친가(親家)를 통해 플랑드르(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를 상속받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독일 일부, 네덜란드, 남부 이탈리아, 시칠리아, 사르데니아 지역을 차지하는 유럽 내 최강의 군주가 된다. 이 지역들은 프랑스를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다.

▲카를 5세 당시 유럽 지도.

▲카를 5세 당시 유럽 지도.

위기를 느낀 프랑수와는 카를 5세를 견제하기 위해, 루이 12세가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누이 메리 튜터와 혼인함으로 인한 양국간의 평화 관계를 이용하여 헨리 8세와 손을 잡기도 한다. 하지만 헨리 8세가 카를 5세와 다시 동맹을 맺자, 잉글랜드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 기즈 가문과 연관된 스코틀랜드를 지원한다. 잉글래드와 손을 잡을 때는 위그노에 대하여 관대할 수밖에 없었으며, 스코틀랜드와 우호적일 때는 기즈 가문의 영향으로 위그노를 심하게 핍박하게 된다.

정치 판도에 민감한 프랑수와는 교황과 손을 잡고 신성 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가 지배하게 된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권력 구도를 깨뜨려 보려고 한다. 프랑수와가 이탈리아 침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루이12세가 밀라노의 비스콘티(Visconti)의 외손자로 1499년에 밀라노를 점령했었고, 프랑수와 역시 1515년에 3만 5천의 군사를 끌고 이탈리아를 공격하여 마리냥(Marignan)전투에서 승리하므로 밀라노를 통치했던 영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를 5세 역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가톨릭의 수호자로서 이탈리아와 교황을 지키는 것이 그의 당연한 임무라 생각하였기에, 두 왕 사이에 이탈리아를 두고 27년에 걸친 전쟁을 하게 된다.

1524년 10월에 이탈리아를 침공한 프랑수와는 카를 5세에게 밀려 밀라노에서 밀려났으며, 1525년 2월 파비아(Pavia) 전투에서 자신의 군대 2만 8천명이 전멸될 뿐 아니라, 포로가 되어 5월에 마드리드 감옥에 투옥된다.

누이 마흐규리트의 석방 노력과 전쟁 자금이 필요했던 카를 5세와 1526년에 마드리드 조약을 맺고, 석방금을 우선적 조건으로 석방된다. 석방금 외에 많은 영토를 포기했어야 했으며, 프랑수와의 두 아들을 인질로 보내야 했고, 루터를 반대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인질로 있던 그의 두 아들은 깡브레(Cambrai) 조약이 맺어진 1530년에 프랑스로 돌아오게 된다.

마드리드 조약으로 풀려난 프랑수와는 곧바로 조약 포기를 선언하고, 권력의 줄타기를 하던 교황 클레멘트 7세(Clement VII)를 중심으로 카를 5세를 폐위시키기 위해 결성된 꼬냑 동맹(1526년)에 가입한다.

한편 카를 5세는 꼬냑 동맹을 빌미로 1527년 5월 로마를 포위하고 교황을 사실상 구금하며, 샤를 드 부르봉 공작이 이끄는 기병부대에 의해 로마 약탈(Sacco di Roma)이 벌어지게 된다.

프랑스, 스페인, 교황청은 가톨릭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서로 배신하는 민족주의가 싹트면서는 교회는 더욱 힘을 잃게 된다. 권력을 위한 가톨릭 국가간의 배신과 오랜 전쟁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스캔들로 인해 유럽인들은 개혁주의에 대해 큰 호감을 갖게 된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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