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권력 휘두르던 종교 핍박자도 결국은…

류재광 기자  jgryoo@chtoday.co.kr   |  

[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22] 종교 개혁 당시 교회의 모습 3

3) 위그노 핍박에 앞장서게 되는 가톨릭 세력의 기즈(Guise) 가문

프랑스 북쪽 국경 지역 로렌(Lorraine) 출신의 기즈 가문이 최고 권력 가문이 된 것은 끌로드 드 기즈(Claude de Guise 1496년-1550년) 때부터이다.

끌로드는 프랑수와 1세와 함께 유럽의 많은 지역을 다니면서 외교와 전쟁에 공헌한 댓가로 왕으로부터 많은 땅과 권력을 부여받으며, 재력으로 귀족들을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 동안 한국에 소개된 자료들 중, 끌로드가 농민 폭동인 자크리난(1358년) 진압으로 권력을 얻었다는 기록들은 연대상으로 맞지 않다.

▲프랑스에서 로렌 지역의 위치.

▲프랑스에서 로렌 지역의 위치.

끌로드의 세 자녀 모두는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장녀 마리 드 기즈(Marie de Guise 1515년-1560년)는 1538년 스코틀랜드 제임스 5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지만, 4년 후인 1542년에 딸 메리 스튜어트(1542년 -1587년)가 태어난지 일주일 만에 남편이 죽는다. 그 후 9개월 된 메리가 스코틀랜드 왕위에 오르게 되자, 마리의 섭정을 통해 기즈 가문이 스코틀랜드에서 실권을 잡게 된다.

그 후 6세의 메리는 잉글랜드 헨리 8세를 견제하기 위하여 프랑수와 1세의 손자 프랑수아 2세와 약혼하므로, 기즈 가문은 프랑스에서도 왕세자의 외척으로 실세가 된다.

▲스코틀랜드의 실세가 된 마리 드 기즈(Marie de Guise).

▲스코틀랜드의 실세가 된 마리 드 기즈(Marie de Guise).

장남 프랑수아 기즈(François de Guise 1519년-1563년)는 용감한 군인으로 카를 5세의 대군과 대항하여 메츠(Metz)를 지키고 잉글랜드로부터 깔레(Calais)를 탈환하므로, 왕으로 부터 큰 신임을 얻게 되며, 군 총책임자로 가톨릭 세력의 수장(首長)이 된다.

▲프랑수아 드 기즈(François de Guise 1519년-1563년).

▲프랑수아 드 기즈(François de Guise 1519년-1563년).

차남 샤를 드 기즈(Charles de Guise 1524년-1574년)는 1538년 삼촌 장(Jean)의 사직으로, 14세의 나이로 행스(Reims)의 대주교가 되며, 1547년에 그의 삼촌을 이어 로렌의 추기경이 된다.

▲샤를 드 기즈(Charles de Guise 1524년-1574년).

▲샤를 드 기즈(Charles de Guise 1524년-1574년).

이처럼 가톨릭을 배경으로 한 권력 가문이었기에, 프랑스는 물론 스코틀랜드에서도 가문의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되는 개혁 세력에 대해서는 철저히 제거하는 선봉적 역할을 하며, 이 가문으로 인해 위그노 학살과 종교 전쟁이 발발(勃發)하게 된다.

4) 프랑수와 1세의 종교 정책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독일에서 루터주의가 시작되었고, 1520년에 루터주의 사상이 프랑스에 들어오게 된다. 프랑스의 종교 개혁은 정치 개혁이나 사회 개혁이 아닌, 루터의 사상을 통해 깨닫게 된 ‘복음의 회복’에 관한 외침이었다. 초기 개혁자들은 모두 사제 출신의 학자들로 성경에서 멀어진 교회의 미신적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교회 개혁을 주장한 것 뿐이었다. 개혁의 시동을 걸었던 르페브르도 오직 “복음을 알라. 복음을 따르라. 복음을 모든 이에게 알게 하라”는 복음에 대한 열망 뿐이었다. 그러나 교회 개혁 운동을 교황권과 가톨릭 정치 세력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한 소르본느 대학은, 1521년 4월 15일에 루터 사상을 이단으로 정죄하게 된다. 이 일을 통해 순수한 교회 개혁 운동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므로, 가톨릭 세력을 결집시키는 계기로 삼는다.

1521년 10월 21일에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마틴 루터에 반대하는 7성사 옹호’라는 책을 통해 루터를 반대하며 교황에 대한 깊은 충성을 통해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1525년에는 프랑수와 1세가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섭정하던 모후(母后)인 루이즈가 종교 권력자들의 압력에 위그노 박해를 허락하게 된다.

▲프랑수와 1세의 체포 모습.

▲프랑수와 1세의 체포 모습.

프랑수와가 마드리드에 투옥되어 있던 10개월의 기간 동안, 왕의 부재(不在)를 호기 삼아 기즈 가문을 중심으로 평소 위그노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던 가톨릭 교회와 국회, 가톨릭 신학의 본산지인 소르본느 대학 등 세 기관은 이를 위그노를 척결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연합하여 탄압하기 시작한다.

또한 의회는 피신한 개혁자들을 보호하며 친위그노적인, 왕의 누이 마흐규리트에게 서신을 보내어, 현재의 재난의 이유는 이단 처벌에 왕이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왕의 석방을 위해 노력한 나바르 왕국의 여왕 마흐규리트를 결국 프랑수 왕국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린다.

▲나바르 왕국 지도.

▲나바르 왕국 지도.

또한 막대한 석방금과 많은 영토를 양보한 채 석방된 프랑수와는 자국에서의 통치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권력 강화를 위해서는 가톨릭 측의 강력한 힘을 필요로 했기에 개혁주의 탄압에 동의를 하게 된다.

개혁자에 대한 박해의 본격적 시작은 1525년 모(Meaux) 그룹에 속한 개혁자을 탄압하여, 르페브르를 비롯한 기욤 파렐, 제라드 후셀 등이 도주하므로 모에서의 개혁운동은 해체되고 만다.

하지만 프랑수와는 1526년에 개신교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유를 허락하는 것은, 자신의 나라에서는 개혁자들로 인해 국론 분열을 원하지 않지만, 독일의 루터파를 지원하므로 카를 5세에게 부담을 주기 위함이다.

1527년에 권력의 줄타기를 하던 교황 클라멘트 7세(Clément VII)는 카를 5세의 침공으로 로마가 약탈당하며, 교황 자신은 거의 감금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잉글랜드의 앙리 8세 (Henri VIII, 1509년-1547년)는 교황에게 Anna Boleyn와 결혼하기 위하여, 과거 자신의 형수였던 까뜨린(Catherine d’Aragon)과의 결혼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결혼 무효를 요구한다. 하지만 카를 5세의 수하에 있던 교황은 카를 5세의 숙모가 되는 까뜨린과의 이혼을 허락할 수 없었다. 이를 빌미로 헨리 8세는 1531년 2월에 켄터베리 대주교에 의해 영국 교회의 수장임을 선포하고 교황청과 결별하게 된다.

1533년 11월 1일 니꼴라 꼽(Nicolas Cop)의 연설 사건으로 파문이 일어나자 프랑수와는 소르본 교수들의 편을 들어주면서, 그의 아들 앙리2세와 교황 클레멘트 7세의 질녀 까뜨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와의 결혼을 추진하여 막대한 지참금과 가톨릭 세력과의 동맹을 보장 받으려 한다. 1533년 10월 28일에 막세이(Marseille)에서 교황을 만나게 되는데, 교황은 4명의 프랑스인 추기경을 세워주는 대가로 루터파를 비롯한 개혁주의에 대한 철저한 척결을 요구한다. 하지만 프랑수와는 모든 개혁주의에 대한 척결의 요구는 반대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누이를 배려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역시 개혁주의자들이 요구하는 교회 개혁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534년 10월 17일 밤부터 일어난 벽보 사건은 앙뚜완 막꾸흐(Antoine Marcourt)가 제작한 25x37cm 크기의 벽보를 프랑스 전역에 붙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프랑수와는 개혁자들을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반대 세력으로 판단하고 초강경책으로 처벌하게 되며, 프랑수와는 개혁주의자들과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1백여명이 체포되었고, 11월 13일에 화형을 당하는 자도 나오게 된다.

벽보 사건 이후, 1535년 1월 13일에 새로운 책의 출판을 금하는 칙서가 발표되지만, 바로 그 날에 앙뚜완 마흐꾸흐는 1534년 11월부터 인쇄해 두었던 미사에 관한 글을 또 다시 파리에서 배포한다. 그러나 앙뚜완을 처벌하지 못하는데, 의회와 신학에서 높은 직을 갖고 있던 가톨릭 진영의 Antoine Dupratt의 서기관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깔뱅은 이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를 완전히 떠나게 된다.

가톨릭 진영은 그해 1월 21일에 “그리스도의 몸을 공경하는 미사로 속죄함”을 알리려는 대대적인 종교 행렬을 갖는다.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은 왕은 성례를 행하는 행렬을 따랐고, 파리의 성직자들과 고위 귀족들은 그 뒤를 따랐으며, 성골(聖骨)과 가시 면류관, 나무 십자가, 예수님의 피 한 방울, 성모 마리아의 우유(가난한 마리아의 생계를 책임진 마리아가 키운 암소의 우유)가 든 성물함을 들고 행진을 하였다. 행진 후 6명의 개혁자들을 화형시켰고, 25일에는 궐석 재판에서 73명에게 사형을 선포한다. 2월 15일에는 깔뱅의 후원자이며, 성경 출판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열정을 가졌던 에띠엔느(Etienne de la Forge)도 화형을 당하게 된다. 벽보 사건이 일어난 1534년 11월에서 1535년 5월 까지 20-30명이 잔인한 고문을 받은 후에 처형되었다.

신성 모독에 대한 속죄의 형태는 두 가지인데, 부정했던 미사에 대한 찬양으로 배교하거나 아니면 개혁자들의 몸을 폐기하는 화형으로 이뤄졌다.

그후 1535년에 프랑수와 1세는 카를 5세를 견제하기 위한 잉글랜드 헨리 8세와 루터파 제후들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자, 7월 16일에 ‘꾸시 칙령(Edit de Coucy)’을 발표하고 개혁자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는 관용 정책을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다시 개혁자들을 박해하며, 1536년 2월 4일에 프랑수와는 오스만 제국의 슐탄 솔리만 2세와 동맹을 맺으면서까지 카를 5세와 대항한다. 그해 3월에 기독교 강요 초판이 출판되며, 1539년에는 제 2판이 스트라스부르에서 출판된다. 두 번째 판은 초판보다 무려 3배의 분량으로 인문주의의 주 단골 주제인 하나님과 인간 인식에서부터 시작되며, 신학적 발전도 현저하다. 특히 새롭게 추가된 교회론은 난민 교회의 목회 경험의 열매이며, 그의 모든 신학 역시 목회적 관점에서 언급하고 있다.

1540년 6월 1일에 가혹한 퐁텐불루 칙령(Edit de Fontainebleau)으로 위그노를 탄압하는 법을 제정하는데, 이단은 세속 법정에서도 다룰 수 있도록 허용하였으며, 깔뱅의 「기독교 강요」의 배포 및 독서가 금지된다.

1542년에 소르본느 대학은 가톨릭 사상을 보호하며 동시에 개신교 사상의 확산을 막기 위한 금서(禁書) 목록을 작성함과 동시에, 1543년 29개의 신앙과 관련된 책들을 출판한다. 1545년 4월에는 메링돌(Merindol)을 중심으로 하여 발도파(vaudoise)를 학살하는데 그 배경은 이러하다.

▲ 메링돌 대학살 지역과 프랑스에 합병되는 주변 지역

▲ 메링돌 대학살 지역과 프랑스에 합병되는 주변 지역

프랑수와가 카를 5세와에게 패한 후 마드리드에 구금되었을 때 교황의 중재로 석방될 때 개혁자 탄압에 동의하였으며 곧이어 교황과 꼬냑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리고 아들 앙리2세와 교황의 질녀와의 결혼을 위한 만남에서도 개혁자 탄압을 수용했지만,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게 되자, 이교도와 손을 잡을 뿐 아니라 자국의 이단도 옹호한다는 국제 사회의 비난을 집중적으로 받게 된다.

프랑수와는 자신이 비가톨릭적이지 않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당시 메링돌(Merindol) 주변 도시들이 프랑스로 편입되는 상황에 20만 명의 개혁자들이 도피하여 은거하고 있었기에 눈의 가시와 같았다. 그런 상황에 Tournon 추기경이 사도성을 갖고 있는 로마 교회를 따르기 위해 이들을 탄압할 것을 요구하자, 5일 동안 2-3천명을 살해하였고 670명은 노예선으로 보냈다. 여인들에게는 못할 짓들을 행하고 살해하는 잔혹한 일을 행하였는데, 초대 교회 신자들을 무참히 살해했던 로마 권력은 새로운 권력 형태로 바뀌어 교회 개혁을 외쳤던 위그노들을 권력 유지의 방패 막이로 무참히 탄압하였다.

1547년에 사망하는 프랑수와는 1546년 프랑스 최초의 교회인 모(Meaux) 교회 지도자 14명을 화형 시키는 것으로 그의 인생을 마감하며, 그가 죽던 3월에 깔뱅을 표적으로 한 트렌트 회의(Le Concile de Trente)가 시작된다. 이는 프랑수와를 잇는 앙리 2세 역시 계속적으로 개혁자들을 박해할 그 기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바실리크 생 드니(la basilique de Saint-Denis)에 안치된 프랑수와 1세(1547. 3.31 사망)의 무덤. 절대 왕권을 꿈꾸며 권력을 휘두르던 그는, 옷 한 벌 입지 않은 벗은 몸으로 권력의 허무함을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바실리크 생 드니(la basilique de Saint-Denis)에 안치된 프랑수와 1세(1547. 3.31 사망)의 무덤. 절대 왕권을 꿈꾸며 권력을 휘두르던 그는, 옷 한 벌 입지 않은 벗은 몸으로 권력의 허무함을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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