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23] 종교 개혁 당시 교회의 모습 4
1) 앙리 2세(Henry Ⅱ 1519-1559)의 불행한 어린 시절
왕의 차남으로 태어난 앙리는 마드리드 조약으로 인해 장남 프랑수아(François, Duc de Bretagne)와 함께 1526년에서 1530년까지 스페인에 머물게 된다. 어린 나이의 포로 생활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여 우울증을 갖게 하였다. 또 아버지와 어려운 관계로 웃음이 없는 과묵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1533년 10월에 앙리와 동갑 나이인 14세의 이탈리아 소녀 까뜨린(Catherine de Médicis 1519- 1589)이 정략결혼하여 프랑스로 시집을 온다. 하지만 프랑스 왕실이 기대했던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막대한 지참금은 까뜨린의 삼촌인 교황 클레멘트 7세의 갑작스러운 사망(1534)으로 교황청은 지참금 지불을 거절하게 되므로 까뜨린은 곤경에 빠지게 된다. 또한 든든한 정치적 힘이 되어줄 삼촌의 부재로 까뜨린은 왕실에서 무시를 당하였고, 또 남편의 외면으로 오랫동안 출산하지 못함으로 왕실에서 이혼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1544년에 퐁텐불루 성에서 프랑수와 2세를 출산함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포로 생활을 통한 모성애의 결핍이었는지 앙리는 20세 연상 디안느(Diane de Poitiers)를 사랑하게 된다. 디안느는 앙리의 할머니 루이즈 시종으로 궁정에 들어왔다가 모후 끌루드의 시종으로 앙리 2세를 키웠다. 1536년에 형 프랑수아가 급사(急死)하므로 앙리는 왕의 후계자가 되어 프랑수와 1세가 죽는 1547년에 28살의 나이로 왕이 된다.
2) 개혁자를 핍박하는 앙리 2세
앙리가 왕이 되자 애첩 디안느는 왕비처럼 행사하여 성직자를 비롯한 모든 관직 임명에 참여하였고, 본인이 가톨릭에 우호적이었기에 기즈 가문을 주요 관직에 등용시킨다. 이는 앞으로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가 얼마나 심할지 예상케 한다.
앙리는 1547년 10월에 이단 엄벌을 위한 파리 의회에 ‘불타는 법정’(chambre Ardente)이라는 종교 재판소를 개설하여 3년 동안 개신교 500명 이상을 체포하고 많은 개혁자들을 화형시키는 끔찍한 탄압을 하였다.
1549년 11월 19일에는 종교 재판소에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하였다. 같은 해, 당시 깔뱅의 책들을 쥬네브에서 가지고 와 판매하던 행상인 막세 모호(Marcé Moreau)가 뜨와(Troyes)에서 체포되어 산 채로 화형을 당하면서 다음과 같은 찬송을 불렀는데, 이 곡은 무명의 시에 1540년에 Henri Bordier가 작곡한 것이다.
“나의 처지를 가만히 돌아볼 때 한 가지 사실이 나를 위로하네 / 비록 내 몸은 죽일지라도, 내 영혼은 결코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이 / 잔혹한 권력을 가졌을지도, 그들의 손은 결코 강하지 않구나 / 세상 모든 것을 죽이는 힘을 갖고 있다할지라도, / 내 몸과 영을 함께 죽일 수 없구나. / 나의 동역자들과 나의 다정한 친구들이여… / 내가 죽기 전에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것은 / 약한 우리 몸은 죽더라도 / 우리의 영생을 빼앗아 갈 수 없는 저 원수들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 오직 그분만을 두려워하세요 / 우리의 영과 육을 함께 지옥에 던질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그분만을…”
그는 이 찬송을 부르며,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친구들을 오히려 위로하며 찬송하며 화형의 자리에서 죽어갔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의 자세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이 사건 이후에 1551년 6월 21일 앙리는 샤또브리앙 칙령(l'Édit de Chateaubriand)을 통하여 순교자들이 화형 당할 때 소리 지르지 못하도록 혀를 자르는 내용과 종교재판은 신속히 처리하여, 탄원이나 관용을 배제하며 성경과 관련된 책이나 쥬네브(제네바)에서 출판된 책들을 금서로 정하였다.
1552년에 앙리는 발도파 학살(1545년)에 대한 무혐의 판정을 받았으며,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과 샹보흐 조약((traité de Chambord)을 맺고서 이들에게 병력과 보조금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 대가로 메츠(Metz), 뚤(Toul), 베흐덩(Verdun)의 주교 관할지역을 프랑스로 넘겨 받는다. 1552년 10월에서 1553년 1월까지 메츠는 카를 5세 군대에 의해 함락되지만, 프랑수와 드 기즈는 제국의 군대가 장티푸스로 죽어 가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다시 탈환하므로 그의 용맹을 떨치게 된다.
이 시기에 깔뱅은 제네바에 머물면서 서신으로 고통 받는 성도들을 위로하였고, 책과 설교문을 인쇄하여 격려하였다. 1549년까지 쥬네브에는 한 명의 인쇄업자를 통하여 158권의 책을 출판하여 대부분 프랑스로 보냈다.
그러나 샤또브리앙 조약으로 이단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면서 21명의 인쇄업자와 9명의 서적상이 쥬네브(제네바)로 피신한다. 1550년-1559년까지 22명의 인쇄업자, 72명의 서적상들이 도피하였으며, 허가된 인쇄업자들을 통하여 불어권 대부분의 책들은 쥬네브에서 출판하게 된다.
1555년부터 깔뱅은 책 출간 뿐만 아니라, 200명이 넘는 사역자들을 프랑스로 파송하여 교회를 세우며 목양하게 한다. 1555년에 1명, 1556년에 3명, 1557년에 11명, 1558년에 22명 1559년에 32명, 1560년에 12명, 1561년에 146명, 1562년에 12명을 파송하는데 그들 모두가 목사였던 것은 아니었다. 29명의 목사, 10명의 신학생, 각 2명의 장로와 집사, 6명의 과거 수도사, 1명의 사제 출신, 그 외에 교수와 교장, 법률가, 예술인 등이었다.
1555년부터 1572년까지 많은 훈련된 사역자들을 프랑스 교회로 보내었고, 그 결과 1572년 통계에 의하면 2,150개의 개혁교회가 생겨났고, 까뜨린이 교황에게 “로마 교회에서 이탈한 개혁자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아 이제 창이나 칼과 법률로서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알리고 있다.
한편 앙리 2세는 1557월 7월에 꽁삐엔느 칙령 (l'Édit de Compiègne)을 통하여 개혁자들에 대한 관대한 재판을 엄격히 금지하고, 이단 정죄 받은 자의 재심청구권을 허락하지 않는 칙령이었다.
가장 혹독하게 개혁자를 처벌하였던 앙리 2세는 수많은 처벌 칙령을 발표함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에 대한 근절은 실패하였고, 1557년부터는 귀족 가운데서도 개혁주의에 동참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나바르 왕국의 앙뚜완(Antoine de Bourbon)과 그의 형제 루이(Louis I de Bourbon, Prince de Condé)와 안느 몽모렌시(Anne de Montmorency)의 조카인 프랑수와 꼴리니(François de Coligny d'Andelot)와 가스파흐 꼴리니 장군과 그의 형 추기경 갸스파흐 드 꼴리니(Gaspard de Coligny) 등이 참여하였다.
프랑수와 꼴리니에 대한 이런 일화가 있다.
개혁자에 대하여 단호히 처벌하던 앙리 2세와 왕비 까뜨린 드 메디치는 1558년에 프랑수와 꼴리니가 사는 montceaux les meaux를 직접 찾아와 개종을 권면한다. 그는 왕 앞에서 “나의 몸과 재산을 드려 왕을 섬길 것이나 왕께 정중히 부탁드리는 것은 구원 받은 내 신앙 양심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담대한 말을 남기고 Melun성에 감금된다.
1557년 9월에는 Caboche Clerc가 신성 모독죄로 억울하게 죽은 두 형제에 대한 복수심으로 앙리 2세를 암살하려다 미수로 끝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1557년 9월 4일에는 3-4백명의 위그노들이 개혁자들이 예배 모임을 갖다가 체포되며 화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9월 4일 밤에 3-4백명의 위그노들이 성찬을 위해 소르본느 뒤쪽에 위치한 한 집에 모였다. 자정(子正)쯤 신자들이 모임을 마치고 그 장소를 떠나려 할 때 그들은 돌 세례를 맞으며 비명을 지르지만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떤 귀족은 자신의 칼을 꺼내어 여인들과 아이들을 보호하고 피신하도록 길을 만들어 주었지만, 120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 7명은 9월 14일과 27일에 화형되었다.
순교자들은 60세의 나이로 학교 교장이며, 파리 개혁 교회 장로였던 니꼴라(Nicolas Clinet)와 장로이며 파리 의회 소속 변호사이었던 Taurin Gravelle, 여자인 필립프(Philippe de Luns)는 교회 장로였던 남편 Graveron과 최근에 사별한 23살의 과부였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모범적이며 신실한 삶을 살았었고, 그녀의 집은 성도들의 교제를 위하여 항상 개방하였었다. 과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을 결코 쉬지 않았고, 그녀는 소르본느 학자들에 의해 비록 몸은 감옥에 갇혔지만 승리하였다. 그녀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배운 것들이며, 늘상 고백했던 '마지막까지 믿음으로 살다 죽을 것이라'는 고백처럼 믿음으로 마지막을 마치게 된다.
사형 집행 전에 마지막 취조를 한 사제들은, 그들을 화형대 쪽으로 보낼 것을 명령한다. 그러자 한 집행자는 개혁자들에게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복음서의 말씀처럼, 사형자들이 각기 나무 십자가를 메고 형장으로 갈 것을 명한다. 그러자 필립프는 “신사분, 당신은 나를 부당하게 정죄한 십자가를 강제적으로 지게 하는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죽음이라고 말을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말한 이런 류의 십자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라 말을 했다. 곧이어 개종을 거부한 그들의 혀를 자르려 할 때, 아무도 이 고통스러운 형벌에 저항하지 않았고, 요구한대로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필립프는 행복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했다. “내가 내 몸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데, 내 혀를 아끼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결혼식의 신부처럼 결혼식 예복을 입고 있었고, 마침내 그녀 죽음을 환송하기 위한 군중들 앞에 섰다. 개혁자들은 산 채로 잔인하게 화형을 당하였지만, 모두가 죽는 그 순간까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죽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의 믿음과 영혼의 평온함을 군중들에게 보여주었다. 여자인 필립프는 먼저 목이 나무에 메달렸고, 그리고 발부터 얼굴까지 불길이 그녀를 휩싸았다.
세 명의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 즐거움에 대한 많은 욕구로 변절하기 쉬운 젊음에서도, 늙음의 쇠약함에서도, 연약한 여성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승리를 보여주었다. 다른 두명의 순교사는 의사인 Nicolas Le Cène과 법조인 Pierre Gabart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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