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25] 종교 개혁 당시 교회의 모습 6
1) 프랑수와 2세(Francois II 1544 -1560)의 생애
프랑수와는 앙리 2세의 장남으로, 1559년 7월에 15세의 나이로 왕이 되지만 재위(在位) 17개월 만에 병으로 생애를 마감한다.
그는 14세 때 기즈 가문의 열렬한 가톨릭 신자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마리 스튜어트(Marie Stuart 1542 -1587)와 결혼하였고, 앙리 2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이 된다. 그러나 병약했고 통치 능력이 없었기에,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처외삼촌들인 프랑수와 기즈와 로렌 추기경이 모후(母后) 까뜨린을 누르고 섭정의 자리를 차지한다.
기즈 가문에 속한 로렌 지역은 1506년에서야 프랑스로 예속되었고 늘상 이방인처럼 간주되었던 변방의 기즈 가문이 깔레(Calais) 지역의 영토를 회복한 업적과 왕의 외척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가톨릭 당인 기즈 가문의 섭정은 또다시 개혁자들에 대한 피의 보복을 불러올 것을 예고한다. 기즈 가문은 개혁주의에 대한 탄압을 빌미로 권력의 독점을 꾀하였기에, 많은 온건파 귀족들이 신앙적 이유 뿐 아니라 정치적 이유로 개혁주의에 참여하게 되므로 양 세력의 정치적 대립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기즈 가문이 왕의 5촌인 나바르 왕국의 앙뚜완을 권력의 중심에 머물지 못하게 견제한 것은, 권력 독점을 위한 욕심 뿐 아니라 왕의 자형인 펠리페 2세의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접경 국가인 나바르 왕국의 번성은 곧 가톨릭 당의 약화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2) 엉부와즈의 음모 (La conjuration d'Amboise)
기즈 가문이 가톨릭 세력들과의 동맹을 통하여 권력을 독점하자, 개신교 귀족들은 어린 왕을 기즈 가문의 영향에서 벗어나 정치적 중립성을 갖도록 하는 무력적 방법을 준비하는데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를 엉부와즈의 음모라 부른다.
1560년 초, 일부 개신교 귀족들은 수뇌부인 쥬네브에 머물고 있는 깔뱅과 나바르 왕국의 부르봉 가문이 왕국의 박해에 대하여 적극적이지 못한 것을 비판하였고, 깔뱅에게 무력으로 기즈의 권력을 무너뜨리려는 방법에 대한 자문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자 깔뱅은 “폭력으로 저항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잃게 될 것이다”며, 강력히 무력 사용을 금지할 것을 충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즈 가문에 반발하던 루이 꽁데(Louis 1er de Conde)와 개신교 귀족들은 가톨릭 교회에 의해 빼앗긴 예배 장소와 예배의 자유를 위한 봉기를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게 된다.
La Renaudie 지역의 영주 조흐쥬 바헤(Georges Barré)의 주변에 개신교 귀족들이 모여 들었고, 1560년 2월 1일에 음모의 주동자들이 낭트(Nante)에 모여 구체적인 계획을 모의하였다. 조르쥬는 프랑스 각 지방에 음모 계획을 알렸고, 많은 지방 귀족들이 참여할 것을 알려왔다. 이들 귀족들 외에 뚜흐, 오흘레앙, 리옹, 발렁스 지역의 상인들과 장인들도 이 음모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이 음모의 사실은 행동으로 옮겨지기도 전에 조흐쥬의 친구이며 파리 변호사인 삐에흐(Pierre des Avenelles)의 배신으로 2월 12일에 기즈 가문에 전달되게 된다.
음모 소식을 접한 기즈는 왕궁을 블루와(Blois)성에서 방어와 공격이 더 용이한 엉부와즈 성으로 옮긴다. 곧 엉브와즈는 계엄령 하에 들어가 미리 방어 체제로 들어갔으며, 견고한 성벽은 방어의 주요한 몫을 담당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조흐쥬의 지휘 아래 전국에서 모여든 무장한 세력들은 먼저 뚜흐(Tours) 근처에 비밀리에 모인다. 그러나 왕이 엉부와즈 성으로 옮겨 갔다는 것을 늦게서야 알고 공격의 목표를 바꾸게 된다. 먼저 일부의 군사가 성안으로 침투하여 성문을 열고, 동료들이 들어가게 하는 계획을 세우는데, 그 계획도 3월 6일에서 16일로 바뀌게 된다.
전쟁 경험이 부족한 조흐쥬는 그의 군대를 르와르 강 반대편에 위치한 흐노(Renault) 성의 숲으로 이동시킨다. 그러나 이미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경험하였고, 왕국 군대의 야전 사령관인 기즈는 빠르게 기병대를 숲으로 보내었고, 3월 10일부터 음모자들은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오합지졸의 조흐쥬의 군대는 거사를 행하기도 전에 1,500명이 체포 당하게 된다. 또한 조흐쥬를 돕기 위해 오흘레앙을 떠난 꽁데의 군대는 왕궁 수비대의 함정에 빠져 엉부와즈에 도착하기도 전에 패배한다. 전쟁에 미숙하며 정보에 뒤진 개신교 군대는 깔뱅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전쟁을 시도하다가 싸움다운 싸움도 못하고 패배하게 된다.
백여 명의 가담자들은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기즈의 약속을 받고 성 안으로 들어가지만, 다음날 아침에 모두 무자비한 죽임을 당하게 된다. 거사 계획 다음날인 3월 17일에 기즈 가문은 본보기를 삼기 위하여 지도부의 귀족들을 하루 종일 잔인하게 사형을 집행하였다.
3월 19일에 죠르쥬는 흐노 성 숲에서 체포되어, 엉부와즈에서 능지 처참을 당한 후 그의 몸 각 부위는 성의 각 문에 매달려졌다. 그리고 나머지 수감자들은 1주일 동안 고문과 사지를 찢는 잔학 행위를 행한 후 엉부와즈 마을 거리에서 학살되었고 1,200여 명의 시체는 르와르 강에 내던져졌다. 피는 마을의 거리로 흘러넘쳤다. 재판 절차도 없이 사람들의 손발은 묶여 강으로 던져 졌고, 수일이 지나 시체로 가득찼고 마을로부터 좀 떨어져 있던 왕궁까지 시체 썩는 악취로 가득찼다.
그리고 기즈는 12월에 오흘레앙에서 열린 삼부회에서는 위그노에 대한 심한 규제안이 통과되었고, 꽁데 공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하지만 프랑수와 2세가 12월 5일 요절하는 바람에 꽁데 공은 죽음을 면하게 된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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