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종교편향 논쟁, 무엇이 문제인가(6)
Ⅰ. 문제제기: 종교와 국가권력
Ⅱ. 서구 기독교 사회의 변화와 개신교 복음주의
Ⅲ. 한국의 종교시장과 타종교
4. 해방 후 미 군정의 종교정책과 개신교
일제 통치의 해방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승리로 이뤄졌다. 1945년 9월 7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포고령 제1호에서 “조선 점령의 목적이 조선인의 인권과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함”이라고 공포하고 있다. 이미 미 군정은 “종교를 포함한 현지 관습을 존중하는 것이 군정의 기본이며, 피점령국 종교에 방해는 말할 것도 없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었다. 이것이 아마도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정교분리를 국가권력이 명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인은 일제 시대 일본의 강요로 신사참배를 해야 했다. 종교상 권리를 침해당한 것이다. 그래서 미군은 한국에 진주한 뒤 38선 이남의 모든 신궁을 해체하고 불태웠으며, 신사도 소각하도록 명령했다. 조선을 일본 신사라는 강요된 종교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사실 일본은 신사참배라는 국가 종교를 통해 조선을 통치했다. 따라서 신사 해체는 당연했다.
미 군정은 1949년 10월 군정법령 11호에서 1925년 제정됐던 치안유지법을 폐지했다. 여기에는 ‘종족, 국적, 신앙, 또는 정치 사상의 이유로 차별’하는 모든 법을 폐지한다고 돼 있다. 이같은 조처에 의해 일제 시대 차별받던 민족종교도 이제 합법적으로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하게 됐다. 해방은 이처럼 민족종교들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의미했다. 그 결과 대종교와 증산교 같은 민족종교가 부흥을 맞았다.
미 군정 하의 유교, 불교, 그리고 기독교
또 미 군정은 유교를 정부 지배에서 해방시켰다. 일제 시대 교육기관이었던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바꿔 종교기관으로 인정했고, 국가가 관리했던 향교도 이제는 유림이 관리하게 했다. 이제 유교는 국가종교가 아니라 유림이 이끄는 사적인 종교로 변화하고 있었다. 최근 고종의 황제즉위식 재현이 이씨 종친회에 의해 이뤄졌는데, 국가 행사가 아니라 종중행사로 치뤄졌다.
미 군정과 불교와의 관계는 약간 복잡했다. 해방 후 불교는 대처승과 비구승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일제 청산을 외치는 비구승과 현실적 실세인 대처승 간의 갈등은 매우 컸다. 이런 가운데 대처승 단체인 중앙 총무원이 당시 입법원을 통해 사찰령과 사찰령 시행규칙, 포교 규칙, 사원 규칙을 폐지하고 대신 불교의 모든 재산권을 불교 대표인 교정(敎正)에게 맡길 것을 내용으로 하는 불교재산 임시보호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또 국보,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호와 같은 일에 관해 행정 관청의 허가를 받을 때에는 교정을 경유해야 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이 임시보호법은 몇 가지 문제를 갖고 있었다. 첫째, 불교의 친일청산을 주장했던 조선불교 총본원의 반발이다. 이 법은 일방적으로 대처승에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둘째, 이 법은 일본 불교 재산까지도 불교 소유로 할 위험이 있으며, 그것도 중앙 총무원에 귀속될 가능성이 많았기에 승인하기 어려웠다. 결국 군정 당국은 임시법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제 유물인 사찰령은 그대로 존속됐다. 하지만 미 군정이 조선 불교를 통제하려 했다는 것은 지나친 음모론이다.
이 과정에서 개신교가 혜택을 봤다. 개신교 가운데 성결교회와 같은 일부 교파는 교단 전체가 폐쇄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북한이 공산화되자 종교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미군은 이들에게 적산의 일부를 분배했다. 여기 해당되는 적산은 주로 천리교나 신도와 같은 단체 것들이 주를 이뤘으며, 일부 일본 불교 재산도 포함됐다. 일본 불교 재산의 일부는 불교에도 귀속됐다. 해방 공간에서 개신교가 많은 혜택을 본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개신교가 일제나 공산주의에 의해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것도 사실이다.
해방 이후 한국 개신교가 미 군정에 의해서 비교적 호의적인 대우를 받게 된 것은 해방 이후 미 군정과 대한민국이 나가려고 하는 방향과 개신교의 방향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군정은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를 실시하려 했고,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것이 개신교다. 개신교는 무엇보다 공산주의를 반대했고, 자유민주주의를 이해했다. 따라서 개신교가 미 군정에 호의적인 대우를 받은 것은 종교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였다.
결국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이유로 다른 대우 받아
이와 같이 당시 종교는 미 군정에게 각각 다른 대우를 받았다. 유교의 경우도 미 군정은 좌파적 유림 지도자인 김창숙을 입법위원에서 배제했으며, 불교의 중앙 총무원 측은 재야세력을 좌파로 공격해 자신들의 입지를 세우려 했다. 미 군정의 지상목표는 자유민주주의 구축이었고, 여기에 협조하는 종교는 우대를 받았다.
해방은 전반적으로 한국 사회에 종교의 자유를 가져다 줬다. 한국인에게 억지로 강요했던 신사는 폐지됐고, 불법으로 지목된 민족종교는 부활했다. 유교는 일제 지배에서 벗어났고, 불교는 내부적 문제로 사찰령이 폐지되지 못했지만 폐지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기독교는 미군이 진주하면서 막강한 인맥과 사상적 동질성으로 가장 큰 활력을 얻게 됐다.
그러나 미 군정은 일제의 종교정책을 그대로 이어오기도 했다. 무속신앙과 유사종교를 규제한 것이었다. 무속신앙은 그때까지 종교로 대우받지 못했다. 아울러 군정은 유사종교가 사회를 혼란시킨다고 생각해 규제했다. 어쨌든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직 정교분리가 온전히 이뤄지지 못했다<계속>.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