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처럼 앞만 보고 달리다가, 비둘기처럼 약해진다
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결국 주님은 믿는 이를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으로 부르신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은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킨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바위를 쳤을 때 갈라진 반석에서 생수가 흘러 나왔는데, 이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온 것을 예표한다. 사실 누구도 바위 틈 낭떠러지에는 가지 않으려 한다. 힘들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믿는 이를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으로 부르시려면 뭔가 좋은 것을 보여주셔야 한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 있을 이러한 부활의 풍성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아가서 1장에서는 믿는 이(여인)가 방황하다 집에 들어와서 만족과 풍성함을 누리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2장에서는 그러한 만족과 안식이 끝이 아니라 이제 십자가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주님은 주로 우리를 환경 가운데서 십자가의 자리로 부르신다. 주님이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하셨으므로(눅 9:23) 주님은 날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의 환경을 마련해주실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십자가로 부름받을 때, 그것이 주님의 사랑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십자가 안으로 부르심
1.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앎
2장에서 주님은 이 여인에게 풍성한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보여주신 다음 그녀를 더 깊은 십자가 안으로 인도하시려 음성을 발하신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어떤 사람이든 그냥 십자가로 가라고 하면 가기 어렵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과 풍성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 부르셔야 한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라 말한 다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했다.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알고, 그런 다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을 수 있다.
찬송가 중에 ‘부활 능력 아는 사람 십자가를 사랑해’라는 가사가 있다. 부활 능력을 아는 사람만이 십자가를 사랑할 수 있다. 죽음 후에 부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죽을 때만이 부활의 능력과 그 풍성을 얻을 수 있다. 시련과 고난, 십자가의 환경 후에는 반드시 부활의 축복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십자가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이렇게 얻은 그리스도는 다른 성도들을 공급하고 사역할 수 있는 자본이다.
2. 생명이 성장하는 비결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부활에 대한 지식이다. 어떤 사람이 씨를 심을 때 싹이 난다는 지식과 확신이 없다면 이를 땅에 심겠는가? 한 알의 밀을 심으면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아직 보지 않아도 황금 들판에 대한 꿈이 있다. 풍성한 수확에 대한 기대가 있기에 밀알을 심는 것이다. 어떤 농부가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밀알을 땅에 뿌리겠는가? 더 많은 수확에 대한 기대, 부활에 대한 기대가 있기에 뿌린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부활의 능력, 부활의 풍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꺼이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으로 갈 수 있다. 은밀한 곳이란 외로움의 의미도 포함한다. 십자가를 체험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외롭고 은밀한 곳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를 체험할 길이 없다. 영적으로 성장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외로운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 생명이 성장하는 길은 오직 깊은 죽음 뿐이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 생명이 자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으려면, 그 십자가로 갈 수 있으려면 부활의 능력과 부활의 풍성을 알아야 한다.
이 십자가는 환경 가운데 많은 어려운 일과 억울한 일 등으로 우리에게 닥쳐온다. 고난과 역경, 환난을 통해 온다. 그럴 때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으로 말없이 간다. ‘내가 이렇게 죽어야 풍성한 부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밀알을 심듯 자기를 죽음에 넘길 수 있다. 이러한 지식과 체험이 없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 억울하게 내가 죽는가? 이런 상황에서 왜 가만히 있는가? 나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길을 찾아 보겠다.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내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고 결백을 주장해야지.’ 그러나 죽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힘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성장이 없다. 믿는 이들의 생명이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은 일어나 십자가로,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으로 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은밀한 곳의 삶이 있어야 한다.
이때 믿는 이는 어두움에 처하게 된다. 낙심과 좌절감, 실망감이 있기 때문이다. 어려움과 핍박의 힘든 환경은 우리를 좌절시키고 침몰시키려 뒤흔드는 파도와 같다. 그럴 때 우리는 잠잠하고 은밀하게 주님과 함께해야 한다. 결코 많은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길을 찾지 말아야 한다. 대개 변화되지 않은 천연적인 사람은 어둡고 답답할 때 길을 찾으려 한다. 이제까지 하던 교회 생활과 사람들과의 관계, 많은 현존하는 질서를 깨버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것이 대다수 육체적인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둠 가운데 내린 판단은 다 잘못됐다. 이때는 대개 형제를 미워하고 모든 것에 낙심되기 때문에 영적으로 침침하고 어둡다. 어둠이 눈을 멀게 했기 때문에 결코 갈 길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답답하고 길을 알지 못하고 보이지 않으면 길을 더 찾으려 하고 갈 길을 정하려 한다. 그러한 때는 길을 찾고 결단할 때가 아니라 조용히 문을 닫고 기다리며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빛을 기다릴 때다. 빛이 오면 주님은 빛 가운데 갈 길을 알리신다. 어두울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하고 많은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실수와 죄를 적게 범하게 된다.
3. 문을 닫는 외로운 길
열왕기하 4장 1-7절까지를 읽어보면 선지자 생도의 가정이 빚을 졌는데 선지자 생도는 죽었고 채주는 돈을 못 받게 되자 두 아들을 잡아 종을 삼으려 했다. 과부가 된 그 아내가 엘리사에게 왔다. ‘저희를 좀 살려 주십시오.’ ‘너에게 무엇이 있느냐?’ ‘우리 집에 기름 한 병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웃에게 빈 그릇을 빌리라.’ 두 아들과 어머니가 빈 그릇을 가져오는 대로 기름이 가득 채워졌다.
성경에서 기름은 성령을 의미한다. 가지고 온 그릇에 기름이 다 찼을 때 곧 그쳤다. 우리 마음을 비울 때 성령으로 채우신다. 그런데 여기 단서가 있다. 문을 닫아야 한다. 4절에 ‘문을 닫고’ 라는 말이 있으며, 5절에도 ‘문을 닫은 후에’ 라는 말이 있다. 성령으로 채워지려면 문을 닫아야 한다. 어렵고 답답한 환경을 만날 때 속에 할 말이 많아지고 그러면 문을 열어 여러 말을 하게 된다. 이 사람 저 사람 찾아가 말하고 또 말하다 보면 그릇을 비워 기름을 채울 기회를 완전히 놓쳐버린다. 바로 그때가 비우고 채워야 할 때라는 것을 알고 문을 닫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외로운 길이다.
4. 인내가 있어야 함
생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씨가 길가에 뿌려져서도 안 되고 돌밭에 뿌려져서도 안 되며 좋은 땅에 뿌려져야 한다. 좋은 땅은 어떤 땅인가? 누가복음 8장 15절에서 주님은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했다. 씨가 뿌려질 때 잘 자라서 결실하려면 인내가 있어야 한다. 문을 닫고 은밀한 곳에서 외로이 그릇을 비우고 성령이 채워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성령이 채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인내가 있어야 한다.
성장과 인내는 어떤 관계인가? 십자가로 가는 사람은 인내가 있는 사람이다. 인내가 있는 것과 은밀한 곳에 있는 것은 관계가 있다. 그럴 때 생명이 자란다. 인내가 없는 사람은 말씀을 받을 때는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환난과 핍박이 일어날 때 즉시 넘어진다. 원망하고 성질내고 자기 하고 싶은 것 다하면 어떻게 되는가? 싹이 나오나 즉시 타 버린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이다. 생명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그리스도인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지키고 인내함으로 바위 틈 은밀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한다. 시험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루기 때문이다. 인내가 온전해야 온전히 구비되어 부족함이 없게 된다(약 1:2-3).
5. 비둘기로 변화됨
그런 다음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14절)”고 했다. 1장에서는 여인을 바로의 병거의 준마로 비유했는데, 여기서는 비둘기로 표현했다. 영적인 면에서 비둘기가 준마보다 낫다. 비둘기는 성령의 임하심을 묘사할 때 쓰인다.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 3:16b)”. 그러나 준마와 성령을 관련지어 말한 성경 구절은 찾아볼 수 없다. 말은 그저 거침없이 달릴 뿐이다. 여기서 여인을 비둘기로 표현한 것은 이 여인이 변화됐음을 시사한다.
바로의 병거의 준마가 비둘기 눈을 갖게 됐고 백합화가 됐다. 그리고 포도주의 집에서 많이 누리는 과정을 거친 후에는 비둘기로 변화됐다. 비둘기는 말보다 연약하다. 어떤 사람들이 강한가? 주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강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한 뒤에 ‘나 이제 교회 안 가. 다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거야’ 라고 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경험 있고 주 안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들은 그의 타고난 힘이 점점 약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