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26] 종교 개혁 당시 교회의 모습 7
1. 새로운 왕 샤흘르 9세(Charles IX 1550-1574)의 초기
재위 17개월만에 후계자도 남기지 않은 채 사망한 프랑수와 2세를 이어, 동생 샤를르 9세가 10세의 어린 나이로 1561년 5월에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그러자 누가 어린 왕를 대신하여 섭정할 것인지가 초두의 관심사가 된다. 그런데 그 자리는 지금까지 기즈 가문의 권력에 밀려 늘상 2인자로 소외되어야 했던 모후 까뜨린 드 메디치(1519-1589)가 마침내 그 자리를 차지하므로 권력의 중심부에 서게 된다.
까뜨린은 출생에서 죽는 마지막 날까지 가까운 가족의 사망으로 숱한 고초를 당하였다. 출생 직후 부모를 잃고 수녀원에 감금되기도 했지만, 삼촌인 교황 클라멘트 7세(Clément VII)로 인해 프랑스 왕세자비가 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하지만 버팀목이 되어줄 삼촌의 사망으로 싸느란 냉대를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왕비가 되었지만 남편의 애첩 디안느(Diane de Poitiers)로 인해 권력으로부터 철저한 소외를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남편의 급사(急死)로 대적이었던 디안느의 권력을 꺽을 수는 있었지만, 기즈 가문이라는 복병으로 인해 다시 인고(忍苦)의 시간을 보내기를 1년 6개월.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장남 프랑수와 2세의 병사(病死)로 인해 마침내 차남 샤흘르9세로 인하여 그토록 원했던 프랑스 최고 권력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 이후에도 그녀는 샤흘르 9세와 마지막 아들 앙리 3세 마저 숨지는 기막힌 인생을 살아야만 한다. 그녀가 가는 곳은 늘상 죽음의 그림자가 떠나지 않는다.
1) 까뜨린의 섭정과 뿌와시 종교 회의 (Le colloque de Poissy)
권력을 차지한 까뜨린은 먼저 종교 분쟁으로 인한 더이상의 정치적 혼란에 빠지기를 원치 않았고, 위그노들의 엉부아즈 음모의 실패로 인해 상대적으로 더더욱 초강력의 권력을 가진 기즈 가문의 견제할 방안을 모색해야만 했다. 가톨릭이었기에 가톨릭의 세력을 등에 업어야만 했고 동시에 기즈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커져 버린 개신교와도 손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개신교는 1561년 라 호쉘 총회가 열릴 당시 2,000여 개의 교회와 150만명 이상의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세력과 손을 잡는다면 기즈 가문의 견제와 동시에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두 진영의 화해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561년 9월 9일 부터 10월 14일까지 파리 근교 뿌와시(Poissy)에서 양측의 첨예한 대립이 된 '성찬'에 관한 종교 회의를 열어 양 진영의 신학자들을 소집하여 토론을 갖게 한다. 이를 '뿌와시 종교 회의'라고 칭한다.
회의가 열렸던 곳은 뿌와시의 성 루이(Saint-Louis) 수도원의 식당이었다. 회의 시작 전에 왕은 왕국의 평화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기에 관용을 통한 질서와 화합을 회복할 것을 당부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개신교 측에서는 깔뱅의 후계자 베즈(Théodore de Bèze)와 Pierre Martyr와 훗날 개신교 지도자가 되는 꼴리니 제독(Gaspard de Coligny) 그리고 나바르 왕 앙뚜완(Antoine de Bourbon)과 왕비 쟌느(Jeanne d'Albret) 등 12명이 참석하였다. 가톨릭 측에서는 기즈 공의 동생인 Lorraine 추기경, Tournon 추기경과 40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쥬네브(제네바)에서 온 베즈는 따뜻한 환영을 받았으며, 샤흘르 9세가 거주하는 생 제르망 엉 레이(Saint-Germain-en-Laye) 성에 머물고 있었다. 첫날인 9월 9일은 쥬네브에서 온 베즈와 로렌 추기경과 신학적 토론을 하게 된다.
베즈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제가 될 수 없는 것을 '높은 하늘이 땅과 다르듯, 그리스도의 몸이 빵과 포도주와 동일할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회의 며칠 후, 예수회를 대표하는 Diego Lainez가 교황 특사와 함께 회의장에 도착하여 “교황청의 승인 없이는 종교에 관한 그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는 강력한 항의를 전달하므로 회의는 종료하게 된다. 그러나 가톨릭 진영의 반대로 회의는 실패로 끝을 맺지만, 까뜨린은 개신교를 인정하는 관용의 칙령을 1562년 1월에 선포하므로, 마침내 개신교가 하나의 새로운 종교로 인정되며 도시 밖에서 예배 드릴 수 있다는 예배의 자유를 얻게 된다. 개신교의 대표로 참석한 베즈는 이 회의를 통하여 그의 존재를 알리게 된다.
2)뿌와시 종교 회의 장소를 찾아
가톨릭과 개신교의 화해를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회의인 뿌와시 종교 회의가 열렸던 장소를 찾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그 주소가 나와 있지 않았다. 우연히 한 역사책에서 'La Cause'라는 이름과 주소가 기록되어 있는 책을 발견하고, 이곳이 현재는 이런 용도로 사용되는 장소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주일 오후에 이곳을 무작정 방문하였다. 주소지의 건물을 살펴보니 넓은 장소이기는 하지만 왠지 종교 회의가 열렸을 듯한 건물은 아닌 듯 했어나 일단 건물 사진부터 촬영하였다. 그리고 건물 내부를 살펴 보는데, 건물 안에서 모임을 갖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건물이 종교회의가 열렸던 장소인지 확인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여자 분에게 '깔뱅과 위그노의 흔적을 찾아 온 한국인'이라는 소개를 하자, 그 부인은 다짜고짜 필자를 건물 안으로 인도하여 참석자들 앞에 소개하였다.
마침 북한에 관한 정보를 나누고 있던 시간에 소개되었고, 인사와 함께 이곳을 방문한 이유가 종교회의 장소를 찾기 위함임을 알리고 한쪽 테이블로 안내를 받았다.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프랑스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열렬한 환영을 받아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이유가 이 단체가 한국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간식 시간에 동석한 분들에게 'La Cause'가 어떤 단체인지를 물어보게 되었는데, 이곳은 1920년에 창설된 개신교 단체로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점자책 발행 및 카세트 테이프 제작, 천여 명의 한국 입양아를 위한 사역과 종교 서적 출판 및 청년 크리스챤들을 위한 결혼 중매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으며, 200명의 여러 나라에서 온 자원 봉사자들로 이루진 단체이었다. 우리가 버린 아이들을 입양하여 사랑과 진심으로 돌봐줄 뿐 아니라 그들을 버렸던 조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추진하며 한국 부모 찾기에 앞장 서고 있는 한국과 많은 인연을 맺고 있는 고마운 단체이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자원 봉사들이 3개월에 한번 모임을 갖는데 필자가 방문한 날이 바로 그날이라는 사실과 필자를 왜 이 테이블로 안내하였는지도 시간이 지나고나서야 알게 되었다. 동석한 그 자리에는 종교 회의가 열렸던 바로 그 장소에서 살고 있는 프랑스 역사학자 시릴(Cyril) 교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릴 교수는 간략하게 종교 회의가 열렸던 장소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는데, 시민혁명으로 인해 지금은 건물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개인의 저택 정원으로 사용되고 있기에 일반인은 절대 방문할 수 없다는 이야기와 함께 원하면 함께 가서 설명해 주겠다는 친절을 베풀어 주셨다. 이 글을 연재하면서 많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였지만 이번처럼 극적인 상황은 처음이었다.
모임이 끝나자 여기 저기 많은 분들이 인사를 걸어왔고, 자신의 가족 가운데 한국 입양아가 있음을 알려주는 분들이 많았다. 프랑스에서 한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처음으로 받아 본 따뜻한 인사이었지만, 우리 나라와 한국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을 이 분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과 처음으로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진 날이기도 하였다. 작별 인사를 나눈 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시릴 교수의 안내를 받아 역사의 그 현장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미리 알려주었던 것처럼 이 역사의 장소는 1789년에 일어난 시민 혁명으로 인해 잔해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파괴된 황량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시릴 교수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건물의 흔적들을 일일이 소개해주었고, 그녀가 갖고 있는 소중한 자료들을 선물로 주셔서 그 역사적 현장을 한국 교회에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까뜨린의 결단으로 개신교를 '하나의 또 다른 종교'로 인정하기는 하지만, 교황청의 동의가 없었기에 오히려 가톨릭측의 반발을 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또 다른 학살들의 빌미가 되었고 마침내 36년의 길고 처절한 종교 전쟁(1562-1598)이 시작되게 된다.
역사는 애석하게도 '만약'이라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지만, 만약 교황청이 관용으로 이 회의를 허락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아쉬움을 갖는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