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27] 종교 개혁 당시 교회의 모습 8
3) 성 메다흐 성당 소동 사건(Le Tumulte de Saint-Medard 1561년 12월)
1561년 9월 9일에 시작된 뿌와시 종교 회의는 아쉬움만 남기고 끝났지만 왕궁은 개신교를 수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개신교를 하나의 종교로 인정하는 1562년 1월 생 제르망 관용 칙령(édit de tolérance de Saint-Germain) 발표 이전에도, 기존에 비밀리 모임을 갖던 파리의 여러 개신교 교회 가운데 두 곳의 교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며, 이런 계기로 개혁교회는 더욱 부흥을 하게 된다.
왕궁이 허락한 모임의 한 곳은 Popincourt 영주가 살고 있는 Rue Popincourt의 영주 저택에서의 모임이며, 다른 한 곳은 Canaye 가족의 소유인 ‘족장의 집(la maison du Patriarches)’이라고 불리는 장소에서의 모임이었다. '족장의 집' 교회는 베즈(Théodore de Bèze)가 뿌와시 종교 회의에 참석했다가 돌아가기 전 이곳을 방문하여 설교했던 곳이며, 나바르의 왕 앙뚜완의 동생 꽁데 공작도 1562년 부터 예배를 드리게 된다. 이 족장의 집 교회에서 100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가톨릭 교회인 성 메다흐(Saint-Medard) 성당이 인접하고 있었는데, 족장의 집 교회에서의 대규모의 모임은 가톨릭 교회를 자극하게 된다.
1561년 12월 27일 토요일 오후, 사도 요한의 축제일을 맞아 2천명의 개신교 교인들이 장 말로(Jean Malo)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이곳 족장의 집 교회로 모이게 된다. 그러자 메다드 성당의 주임 신부 앙드레(Saint-André-des-Arts)는 이 모임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교구 교인들을 불러 모으기 위하여 개신교인들의 모임 시간에 성당의 종을 쉬지 않고 친다.
심한 종소리로 인해 예배의 방해를 받게 되자, 말로 목사는 두 명의 교인을 보내어 종소리를 멈춰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두 명의 교인들은 성당 교구 신도들에게 모욕과 심한 폭행을 당하여 사망하는 사건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한 명의 교인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다른 한 명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도망쳐 왔으나 말로 목사의 발 아래에 쓰러져 그대로 죽고 만다.
이 사건을 목격한 위그노들은 격노하게 되며, 보복하기 위하여 무기를 들고 성당을 습격한다. 먼저 성당으로 들어가 가톨릭 교인 몇 명을 살상(殺傷)하였으며, 성당 안의 성상과 스테인그라스와 제단을 깨뜨리며 성물 안치소의 성물을 탈취하였다.
신고를 받고 도착한 당국은 먼저 위그노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급히 공권력을 투입하여 성당의 종소리를 멈추게 하였지만, 이것이 오히려 가톨릭 교인들의 분노를 갖게 한다. 공권력에 의해 종소리가 멈추게 된 것을 안 가톨릭 교인들은 사건 다음날인 주일에 더욱 난폭해졌으며, 위그노 교회를 습격하여 불을 지를 뿐 아니라 폭력으로 100명 이상의 사상자(死傷者)가 발생한다.
당시 군 총사령관 안느 드 몽모렌시 (Anne de Montmorency)는 불탄 개신교 예배당 한 부분을 완전히 파괴시켰으며, 위그노의 재산을 약탈하여 성당 복구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1562년 6월 14일에 4명의 추기경들이 참석한 가운데 복구 기념하는 큰 행사를 갖는다. 그러나 이 사건의 계기로 개신교 박해가 전국적으로 번져갔으며, 까뜨린 드 메디치는 소요를 막기 위해 관료들을 지방으로 파견하지만 관료들은 오히려 아무런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수 백명의 위그노들을 처형시키는 악행을 행한다. 성 메다드 사건 이후 ‘족장 교회’는 rue des Fossés-Saint-Jacques로 이전하여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갖게 된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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