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29] 바시 대학살의 진상 1
1562년 3월 1일 바시 대학살(Massacre de Wassy)
기즈(Guise) 가문은 질녀인 왕후이며, 스코틀랜드 여왕 마리 스튜어트(Marie Stuart)를 통해 권력을 잡게 된다. 그리고 스페인과 교황의 도움으로 가톨릭 당을 이끄는 장기 집권의 꿈을 꾸지만 프랑스와 2세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권력을 까뜨린에게 고스란히 넘겨 주어야만 했다.
권력을 잡은 까뜨린 역시 가톨릭이었지만 이미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린 기즈 가문의 권력을 견제를 위해, 1562년 1월 17일에 개신교를 공식 종교로 인정하는 생 제르망 칙령(l'Edit de St. Germain)을 발표한다. 이 칙령으로 위그노들은 더 이상 숨어서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되는 예배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이 칙령은 다분히 정치적인 것임을 그 서문에서 볼 수 있다. “프랑스 왕국 내에서 두 개의 종교가 영구히 존재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진정한 연합을 이루시기까지 평화와 통일을 유지시키기 위함이다’
1. 가해자(加害者) 편의 일방적인 왜곡된 역사
바시(Wassy)는 프랑스 발음으로는 ‘와시’이나, 이 지역이 독일어권 지역이었기에 ‘바시’로 불린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바시 학살 사건은 이러하다.
1562년 2월에 위그노를 심하게 배척하던 기즈 공과 그의 동생 로렌 추기경이 반(反) 합스부르크 동맹을 위해 독일 루터교 제후들과 협상차 알사스 지방을 방문한다. 그 후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돌아가던 중, 3월 1일 주일 아침에 우연히 기즈 일행은 샹파뉴(Champagne) 지방의 작은 마을 바시(Wassy)를 통과한다. 그들이 그 마을에 도착했을 때, 때마침 마을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게 되었다. 기즈는 그 종소리의 출처를 알아보라고 사람을 보내게 된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보고자는 종소리는 위그노 교회에서 나는 것이며, 현재 약 5백명의 위그노들이 왕궁 소유의 한 곡식 창고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최근 위그노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음을 보고한다. 이 말을 들은 기즈는 화가 났으며 무장한 수행원을 보내어 좀더 자세한 상황을 살펴보고 오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기즈 공은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보고를 기다리면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무장 군인들과 예배 중인 위그노들이 충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때마침 분노한 위그노들이 던진 돌이 기즈 공의 몸에 맞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자 화가난 무장 군인들은 교회를 공격하여 무참히 학살하였고, 그 결과 60여명의 사망자와 200 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바시 대학살은 위그노의 돌멩이 투척 사건으로 시작되었으며, 과잉 진압한 가톨릭 사이에 발생한 쌍방 과실의 사건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전해 오는 사건 내용이다.
2. 비논리적인 바시 대학살에 대한 의구심
이 역사 이야기를 접한 필자는 궁금함들이 증폭하였다. 곧바로 인터넷으로 바시로 가는 길을 찾아보니, 바시는 알사스 지방에서 파리로 가는 국도에서 20Km 이상이나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파리로 가는 길목도 아니다.
그리고 지금도 바시로 가는 길은 자동차 한 대만 다닐 수 있는 작은 길이다. 그런데 왜 기즈는 먼 길을 다녀온 군대를 이끌고 곧바로 파리로 가지 않고 왜 하필 파리와 동 떨어진 이 작은 마을로 갔을까? 그리고 또 군대가 이 마을을 통과할 바로 그 싯점에 어떻게 우연히 종소리를 듣게 된 것일까? 또 어떻게 위그노들이 던진 돌멩이가 호위한 군인들을 피해 기즈의 몸을 정확히 맞추었을까? 아무래도 의도적으로 꾸며낸 소설같은 역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현장을 방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파리에서 230Km 떨어진 시골 마을 바시를 향하였다. 알사스 방향 A5 고속도로를 타다가, 70Km 정도 앞두고 국도로 그리고 다시 지방 도로를 통과한 후 마침내 너무나 한적한 마을 바시에 도착하였다. 먼저 마을 중심에 위치한 바시 노트르담 성당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사건 현장은 그곳에서 100 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무리 허락된 예배라 해도 성당에서 이렇게 가까운 장소에서 위그노들이 예배를 드렸으니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그 학살의 현장으로 향하였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 더 이상 발걸음을 옮겨 놓을 수 없는 순교자들의 억울한 절규가 강하게 느껴졌다. 이들의 순교가 있었기에 오늘의 개신교가 있었음에 대한 감사와 함께 이렇게 늦게서야 이곳을 방문하게 된 미안한 마음을 추스린다. 현장에 와보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정확히 알고 싶은 더 강한 욕구가 일어났고, 복구된 학살 현장 바로 옆 건물안으로 들어갔다.
이 건물은 당시 위그노 교회였으나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자 마자 곧바로 역사책부터 구입하여 읽기 시작하였다. 역사책에 의하면 이 바시 지역은 1258년에 왕 직할지에서 벗어나게 되며, 1552년 부터 한 고위직 귀족의 미망인이 이곳에서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리고 그 귀부인은 다름 아닌 학살의 주범인 기즈의 어머니 앙뚜아네뜨(Antoinette de Bourbon-Vendôme)였다.
더 놀라운 것은 이곳 바시 성당은 프랑수와 기즈의 동생 로렌 지역 추기경인 샤흘르 드 기즈(Charles de Guise )의 직속 관할 12 지역 가운데 한 곳이었다. 그렇다면 바시는 기즈의 모친에게 소속된 땅이며, 동생 로렌 추기경의 관할지역으로, 바시라는 이 마을은 작은 규모와 달리 최고 권력의 정치가와 최고 고위 성직자가 괸련된 마을이다. 그러면 기즈의 군대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간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 어떤 이유에 의해 이 마을을 방문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다음 주에 계속)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