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종교편향 논쟁, 무엇이 문제인가(11)
Ⅰ. 문제제기: 종교와 국가권력
Ⅱ. 서구 기독교 사회의 변화와 개신교 복음주의
Ⅲ. 한국의 종교시장과 타종교
Ⅳ. 최근의 이슈들(3)
1. 민족주의 부활과 정부의 민족종교·민간신앙 지원
2. 정부의 전통종교 지원과 개신교의 반발
3. 단군상 문제와 민족 종교
한국 개신교가 국가와 가장 큰 마찰을 빚고 있는 사안이 바로 단군에 관한 내용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한민국은 건국 과정에서 단기를 사용하고 개천절을 제정하며,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삼는 등 단군을 민족의 종심으로 삼으려는 강한 운동이 있었다. 이는 종종 단군을 단지 민족의 조상으로 보는지, 아니면 신적인 존재로 보는지 하는 문제와 결부돼 개신교와 정부 당국간의 중요한 마찰 대상이 돼 왔다.
단군을 국가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해방 이후 계속돼 왔다. 이미 지적한 대로 이승만은 단군을 조상으로 섬기는 것은 인정해도 그 이상은 반대했다. 하지만 자유당 정권 때 단군전을 건립하려는 운동은 계속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박정희 정권 때였다. 박정희는 민족 주체의식을 강조했고, 그 일환으로 1966년 남산에 거대한 단군상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이는 민족주의와 민족 종교가 결합돼 이뤄졌다.
하지만 개신교가 이를 강력하게 반대해 이루지 못하고, 대신 1968년 사직공원에 현정회(顯正會)라는 단체를 통해 단군상을 설립했다. 이것은 1973년 서울시 보호문화재로 등록됐다. 이어 당시 문화공보부는 국민경모단군상(國民敬慕檀君像)을 제정, 전국에 통일적으로 비치하게 했다. 얼마 후 현정회가 제작한 것을 단군 표준영정으로 결정했다. 이것은 직·간접으로 정부가 이일에 관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85년 서울시는 역점 사업으로 사직공원에 있는 단군상을 중심으로 단군 성전을 크게 확충하기로 하고, 여기에 드는 비용을 국고 지원과 개인 헌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이를 기점으로 전국에 단군전 건립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지리산에는 단군 국조전을 세울 계획도 가졌다. 이는 단군을 민족의 구심점으로 만들려는 민족 종교와 여기에 호응한 정부의 협력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개신교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당시 노신영 국무총리는 개신교 대표를 초청해 이런 계획을 갖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국사 교과서에 단군을 어떻게 기록하느냐의 문제
1987년 한국교회는 단군 문제로 또 하나의 문제에 직면했다. 그것은 국사 교과서에 나타난 단군 기술문제였다. 대종교 안호상을 중심으로 한 재야 사학자들은 정부를 향해 일찍부터 단군 신화를 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한국 사회의 식민지 사관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주장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국사편찬위원회는 이를 수용해 집필 지침을 마련했는데, 그 내용에 “단군 신화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는 단군신화를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제의 식민 사관을 반대했던 것이며, 동시에 오랫동안 단군 신화를 사실이라 주장했던 대종교 계열의 학자들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기도 하다.
얼마 전 단군상 건립문제로 정부와 다시 갈등을 빚었던 개신교는 강력 반발했다. 대다수 개신교인들은 단군이 신화적 인물이며, 따라서 역사가 아니라고 봤다. 곰이 인간이 되는 것은 역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해서 역사교과서에 단군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기술하는 것을 반대했다. 개신교는 이런 주장이 민족 종교를 다시 부활시키려는 정부의 시도라고 이해했다.
여기에 대해 개신교 역사가이며, 동시에 한국사 교수인 이만열은 중도적인 입장에서 이를 해결하려 했다. 그는 단군신화를 단지 신화로만 보는 것은 식민 사관이며, 단군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보는 것은 대종교의 종교 이해이므로 양쪽을 다 배격하고, 단군 신화는 신화라는 언어 속에 역사적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단군은 당시 통치자의 명칭이며, 환웅과 곰의 결혼은 환웅 부족과 곰 부족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현행 역사 교과서에는 이런 입장이 반영돼 있다. 이같은 이만열 교수의 주장은 과거 이승만의 주장과 같다. 단군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지만, 민족의 역사적 인물로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화 인정하지 않는 북한, 단군은 인정… 결국 정치적인 문제
하지만 이 문제는 1999년 다시금 불거졌다. 대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한문화운동회라는 단체가 전국의 초·중등학교와 공원과 같은 공공건물에 369기의 단군동상을 기증해 세우고 전국 곳곳에 단군상 건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쓰여진 건립기에는 단군을 단지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단군 문제에 민감해 있던 개신교는 보수적인 한기총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단군상 건립반대 운동을 벌였고, 한기총은 공립학교에서 특정 종교의 상을 건립하는 것은 정교분리의 원칙에 위반된다며 강력하게 금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정부는 개별 단체의 문제라며 이를 방관했다. 그 가운데 일부 신자들은 이 상을 우상이라 봤고, 이중 69기가 이 와중에 훼손되는 일이 생겼다. 특히 1999년 7월 경기 여주의 한 학교에 세워졌던 단군상 머리가 전기톱으로 잘려나간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에 대해 홍익운동연합(한문화운동회의 후신)은 기독교는 자신의 조상을 모르는 반민족적인 종교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한기총은 2003년 9월, 전국 교회의 학생들에게 이 문제를 알리기 위해 <단군문제통합공과, 역사를 바르게, 소망을 주님께>라는 교재를 만들어 보급했다. 여기에 대해 홍익운동연합은 이 책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며, 반민족적 행위라며 법정에 고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단군에 관한 역사적 객관적 사실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왜곡이라 볼 수 없으며, 단군상은 단지 인물상이 아니라 종교적인 내용을 담았기 때문에 공공 장소에 건립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결했다. 이것으로 일반 개신교는 승리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계속되는 사안이다. 특히 단군상 문제는 북한과 관련돼 일어나고 있다. 원래 사회주의는 단군을 신화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의 주체사상은 그 기원을 단군으로 만들고, 단군을 시작으로 김일성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이는 1993년 북한 인류학자들이 단군 유적을 발굴했다고 공표하고, 거대한 단군상을 세우면서 더욱 구체화됐다. 이러한 사실은 단군 논쟁이 얼마나 정치와 관련이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