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31] 바시 대학살의 진상 3
7. 오늘날의 바시 교회 후손들
바시 교회가 설립되던 성탄절에 주변 도시 교인들을 포함하여 3천여명이 모였으며 학살 당시 주일에는 1,500명이 예배에 참석하였다. 이는 5백년이 지난 현 프랑스에서도 가장 큰 교회의 교인 숫자이다.
바시 교회를 방문한 필자는 그 후손들이 여전히 선대(先代)의 신앙을 잇고 있는지 궁금하여, 주민들에게 이 지역에 교회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바시에는 개신교회가 존재하지 않으며, 디지에(Saint Dizier) 지역에 개신교회가 있으며, 현재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했다. 74명이나 순교하고 1백여명이 상해를 입었던 바시 교회의 후손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 이 궁금함을 확인하기 위해 교회 주소도 모른 채 무작정 20Km 떨어진 디지에로 갔다. 생각보다 제법 큰 도시였으며, 그 지역 주민들에게 개신교회가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봤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한 사람이 개신교회를 본 적이 있다고 하여 그의 말을 듣고 갔지만 가톨릭교회였다.
포기하고 돌아갈까를 생각하기를 여러번.. 자동차로 이동 중 마침 개신교회를 알고 있다는 사람에게 교회 위치를 확인하였다. 교인은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대략 50여명 정도가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지금은 목회자가 없다고 알려주었다. 차를 타고 도로에서 급히 교회 형편을 물어본 것이라, 교회를 찾아가도 목회자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인지, 목회자가 현재 없다는 말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어렵게 찾아간 교회의 게시판에는 Saint Dizier와 주변 Bar le duc 지역에 유일한 교회로 1903년에 현재 교회가 세워졌음을 알리는 광고판이 눈길을 끌었다. 그렇다면 바시 대학살 때 1,500명의 교인 숫자가 현재는 더 넓은 두 지역을 통틀어 50여명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에 가슴 아팠다.
숫자로 신앙을 평가할 수 없지만 청소되어 있지 않은 교회 외벽이 주는 쓸쓸함을 보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는 왕성하던 교회가 예배의 자유가 주어진 지금은 신앙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미실이 사라진 선덕여왕에게는 내부 분열 뿐”이라는 어느 글처럼, 큰 고난이 사라진 현 바시 교회는 신앙의 자유함이 주어졌음에도 정작 신앙의 힘을 잃었음에서 얻는 교훈이 있었다. 고난 없는 형통은 육신의 안락함이 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영혼을 파리하게 만들기에, 적당한 고난의 삶이 유익하다는 것이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8. 바시 박물관을 유지하기도 힘든 바시 교회 후손들
현 바시 교회는 열악한 상황 속에 있었지만 그 선조들이 겪은 역사적 사실을 보존하고 알리려는 그 노력은 귀감(龜鑑)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보관하고 있는 5백년 전의 역사 자료집은 너무나 볼품 없는, 복사용지로 만든 책이 고작이었다. 가난하고 약했던 바시 순교자들의 역사에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아 책 한 권 편찬할 수 없는 형편이지만, 그 자료집에는 소중한 역사들이 고스란이 기록되어 있었다.
언젠가 이곳 학살의 현장을 찾아오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작은 정성들이 모여 책으로 출간되어 그들의 역사를 당당히 알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9. 총을 사용한 자 총으로 망한다
바시 대학살의 주범 프랑수와 기즈는 오흘레앙(Orlean)의 르와르(Loire)강 남쪽 지역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장 드 뽈트로(Jean de Poltrot de Méré, 1537–1563)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장은 몇 년 전 ‘앙부아즈 학살’ 때 자신의 어머니가 살해 당한 것에 대한 복수였다.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종교 전쟁이던 1563년 2월 18일에 그의 아내는 개신교와 화해할 것을 제안하기 위해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기즈는 그의 아내를 만나기 위해 군사들과 함께 이곳으로 오던 중 저격을 당하였다. 사망 전 그는 가족들에게 신앙적 유언을 남기고 2월 24일 44세로 숨을 거두었다.
기즈가 죽은 장소를 찾기 위해 오흘레앙 근처 르와르 강변으로 갔다. 강가 작은 길에서 그가 저격당했던 장소를 알리는 ‘기즈의 돌’이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쉽게 그 장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현장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마침 동네 주민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그 현장에 도착하였지만 역사 안내판은 떨어져 나가고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기억해주지 않는 그의 죽음인데도 왜 그리도 악한 인생을 살았는지 생각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 왔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