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32] 종교 전쟁과 바돌로메 대학살
종교 전쟁(1562년-1598년)과 바돌로메 대학살(1572년 8월 24일)
1. 종교 전쟁
바시에서 학살을 자행한 학살의 주범 기즈가 1562년 3월 16일에 종교적 승리자가 된 것처럼 파리로 입성하자 위그노들의 참았던 분노가 폭발하여 종교 전쟁이 시작된다. 일전에는 위그노들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라 하여 ‘위그노 전쟁’ 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종교 전쟁’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이 전쟁은 여덟 번에 걸쳐 36년간 전쟁과 휴전을 계속하다가, 1598년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으로 평화시대가 도래된다. 하지만 앙리 4세가 광신적인 가톨릭 교도인 프랑수와 하바이약( François Ravaillac)에게 암살되면서, 루이 12세와 13세 시대에 칙령 취소를 시도하다가 마침내 1787년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 칙령으로 낭트 칙령은 취소되고 다시 위그노 박해가 시작된다.
전쟁 기간 중 1572년 8월 24일에 발생한 바돌로메 축제일 대학살은 위그노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사건이었다.
2. 바돌로메 학살의 배경
제3차 종교전쟁이 1570년에 끝난 후, 까뜨린은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해 자신의 자녀들과 개신교국의 정략결혼을 시도한다. 딸인 마고(Marguerite de Valois)는 나바르 왕국의 앙리(훗날 앙리 4세)와, 아들 앙리 3세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시키려 하지만 마고의 결혼만 성사시킨다.
당시 위그노의 수장이며 왕의 중요한 자문관이던 갸스파 드 꼴리니(Gaspard de Coligny)는 독일 신교도 제후들과의 동맹을 통해 합스부르그 가문과 맞서므로, 스페인이 차지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플랑드르(Flandre) 지방을 공격하여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자고 왕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진영의 기즈 형제와 모후 까뜨린 역시 딸 엘리자베스가 스페인의 왕비로 있었기에 전쟁을 원치 않았다.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었으나, 남편과 아들의 죽음으로 마침내 권력을 잡게 된 까뜨린은 왕이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친밀하며 주요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꼴리니 제독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 1572년 8월 18일, 앙리와 마고와의 결혼식을 행한다. 기즈 암살 사건과 종교 전쟁으로 인해 극도로 악화된 가톨릭과 개신교의 관계 회복으로 위기의 국면을 모면하기 위한 정략 결혼은 대외적인 연극일 뿐, 개신교의 수장인 꼴리니 제독의 제거에 대한 욕망은 사그라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정치적 술수에 탁월했던 까뜨린은 꼴리니 제독을 직접 제거하는 일에 무모하게 나서지도 않았다. 당시 아버지 기즈를 이어 위그노에 대한 극심한 분노를 갖고 있던 아들 앙리 기즈(Henri de Guise)는 꼴리니 제독이 기즈의 암살 배후 인물이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까뜨린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제독 제거의 거사를 기즈 가문에 맡긴다. 그리고 결혼식 4일 후인 8월 22일 오전, 가스콘 출신의 한 장교는 화승총으로 꼴리니를 저격하지만 왼쪽 팔에 부상만 입히게 된다. 이 사건으로 결혼식은 혼란 가운데 끝났으며, 꼴리니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위그노 지도자들은 사건의 진실 규명을 요구하게 된다.
위기에 몰린 왕과 까뜨린은 가톨릭 진영의 지도자들로부터도 위그노에게 과도한 힘을 부여했다는 비판에 압도되어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까뜨린은 이 사건이 쉽게 무마될 수 없음을 알고 위그노들을 다 제거하는 방향으로 결심한다. 그리고 8월 23일 바돌로메 축제일 전날 밤 11시에 생 제르망 록스루와 성당의 종소리가 학살의 신호였으나, 거듭되는 전략 회의로 축제일인 24일 새벽 3시에서야 종소리가 울리면서 부상중인 꼴리니를 살해하는 것을 기점으로 대학살은 자행되었다.
흰색 십자가와 스카프를 한 왕의 군대는 먼저 루브르 근처 생 제르망 록스루와 일대에서 시작하여 프랑스 전역에서 결혼식 참석을 위해 온 2백명 가량의 위그노 귀족들이 머물고 있는 보주 광장으로 가서 학살했으며 그들의 시신을 루브르 왕궁 마당에 모았다. 기즈의 군대와 깔뱅의 꼴레쥬 몽떼규 동문인 이냐스 드 로욜라가 만든 예수회 소속의 성직자들이 학살에 앞장 서게 된다.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잔인하고 혹독한 방법으로 살해하여 옷을 벗겨 길거리로 내동댕이칠 뿐 아니라 재산까지도 약탈하였다. 상상 이상의 잔인한 학살로 인해 왕은 정오에 학살 중단의 명령을 전달하였지만, 명령을 알리는 군대의 나팔소리로는 폭도들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약탈자들은 평소 자신의 종교에 그다지 신실치 않은 가톨릭 교도들마저 살해함으로 가톨릭 국가로서의 모습을 정비하려 하였다. 시신들은 강물 속에 던져졌고, 강물은 핏줄기가 되어 흘려갔고, 거리들은 피와 시신의 냄새로 코를 찔렀다. 파리에서 시작된 대량 학살은 그렇게 프랑스 구석구석으로 번져갔다.
3. 전국에 걸친 학살
이 끔찍한 만행은 파리 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프랑스 대부분의 도시로 번져 나갔으며 처음 3일 동안 모든 계층과 신분을 망라하여 10,000명의 위그노 신자들을 죽였다. . 프랑스 전역에 걸쳐 불과 1주일 만에 7만명 이상의 위그노들이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가장 잔혹하고 잔인하게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의 명목으로 살해하였다. 반면 로마 교황청에서는 위그노들을 죽인 이 날을 축제일로 지정하여 기쁨에 도취하였고, 대학살의 소식을 처음 전해 준 기즈 가문의 로렌 추기경에게 1,000 ecus라는 엄청난 포상금을 하사하였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