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33] 갸스파 드 꼴리니
위그노의 거장 갸스파 드 꼴리니(Gaspard II de Coligny 1519-1572)
쥬네브 종교 개혁 공원의 개혁자 석상 좌우에는 각국의 주요 개혁자들의 석상들이 함께 있다. 그 중 석상 오른편에 우리에게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프랑스 위그노를 대표하는 꼴리니 제독의 동상이 서있다. 깔뱅은 프랑스 종교 개혁의 원리적인 것들을 제공했다면, 꼴리니 제독은 그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에 옮긴 위그노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학살로 희생되지 않았다면 프랑스 역사가 바뀔 뻔했던 주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꼴리니가 유명 귀족 가문으로 왕정의 주요 인물로 등용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꼴리니 1세가 1514년에 아이 셋을 가진 과부 루이즈(Louise de Montmorency)와 결혼하면서 부터이다. 루이즈의 동생 안느 드 몽모렌시(Anne de Montmorency)는 훗날 유명 가문의 군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그러나 꼴리니 제독이 세 살 때인 1522년에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게 되자, 삼촌 안느가 교육을 책임지게 되면서 꼴리니는 어릴적부터 인문주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게 된다. 가정교사인 니꼴라(Nicolas Bérault)는 에라스무스와 프랑스 인문주의 대가인 기욤 부데(Guillaume Budé)와 친밀히 교류를 나누던 사이였다.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던 삼촌의 기대와는 달리 삼촌을 따라 군인이 되었고, 해군 제독으로 큰 전공을 세우게 되면서 안느를 이어 권력의 핵심부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위기를 느낀 까뜨린의 음모로 결국 꼴리니가 저격을 당하게 되며, 샤흘르 9세는 모후(母后) 까뜨린과 동생 앙주 공과 함께 부상당한 꼴리니 제독을 찾아간다. 꼴리니 제독은 왕과 독대한 후, 플랑드르 지역에서 스페인에 대항해 계속 싸워줄 것을 요청하지만 까뜨린의 개입으로 대화는 중단된다. 왕은 “나의 아버지여, 당신은 상처로 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소. 다시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드시 복수를 할 것이오”라며 복수를 약속하고 떠난다. 곧이어 위그노 지도자들이 제독의 집을 방문하자, 꼴리니는 위험을 피해 곧 파리를 떠날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지도자들은 마지막까지 왕의 말을 신뢰하고 기다려 보자는 지배적 의견으로 파리에 계속 머물게 된다. 하지만 왕은 모후 까뜨린이 저격의 배후 세력임을 알게 되자 배후 세력을 복수하겠다는 생각은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엉부와즈의 음모를 시도했던 사건을 떠올리며 차라리 위그노 세력들의 정치적 권력에 종지부를 찍으려면 살해하는 것이 낫다는 쪽으! 로 결정하게 된다. 결국 왕은 왕의 군대 외에 용병을 고용하였으며, 주교의 통제 아래 있던 시민 상비군을 동원한다. 왕과 함께 주교와 교구 사제들은 파리 12개의 각 교구에 연대에 해당되는 시민 상비군을 동원하여 구체적인 학살을 계획한다. 새벽 2시에 앙리 기즈는 rue de Béthizy (현재 rue Saint Honoré)에 있는 꼴리니 제독의 집을 포위하였으며, 이 지역의 가톨릭 주민들은 미리 피신시킨 후 거사를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독은 한밤중에 소음이 계속 이어지고 간혹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음을을 직감한다. 하지만 기즈 일가에서 자라났던 제독의 하인인 벰므(Besme)는 기즈의 명령을 받아 제독 집의 문을 열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꼴리니는 자신의 최후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고 함께 있던 메흘랑(Merlin) 목사에게 그의 마지막을 하나님의 자비로움에 부탁드리는 기도를 부탁한다. 그리고 그는 “나는 오래 전부터 죽을 준비가 되어 있소. 하지만 당신들은 피신하여 목숨을 구하시오.”라 말한다. 곧 제독의 주변 사람들은 옥상을 통해 탈출을 시도하지만 대부분 죽고 부하 Cornaton과 Merlin 목사만이 피신하게 된다. 곧이어 암살자들은 배신자 벰므의 인솔을 받고 그의 침실로 들어닥친다.
벰므는 제독에게 “그대가 제독인가?”라고 말하자, 콜리니는 의연하게 “젊은이, 자네는 부상으로 이미 죽어가는 늙은이에게 왔지만, 나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내 생애를 크게 단축시키는 것은 없네.”라고 대답한다. 벰므는 손에 들고 있었던 창으로 제독의 가슴을 찌른후 머리를 두들기자, 제독은 그대로 쓰러진다. 그러자 주변의 가톨릭 교도들은 소지한 무기로 콜리니를 다시 찌르고 때렸다. 그 순간 제독의 뜰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기즈 공작이 창문을 향하여 소리쳤다. “벰므야! 끝났는가?” 그러자 “네! 주인님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라 대답한다.
살인자들은 제독의 시신을 창문 밖으로 던졌고, 기즈는 피투성이가 된 시체로 다가가 피를 닦은 후 제독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제독의 얼굴을 발로 힘껏 걷어찼으며, 곧 머리가 잘려져 나갔고, 그의 머리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까뜨린에게 보내졌다. 그후 방부 처리가 된 그의 머리는 교황에게 보내졌다. 그의 몸은 양팔이 잘라진 채 길거리 여기저기에 3일 동안 끌려 다니다가 발목을 밧줄로 묶어 외곽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친구이자 친척인 프랑수아 드 몽모렌시가 시신을 수습한 후 꼴리니의 집인 샤티옹 성(Chateau de Chatillon)으로 보내어 장례하였다.
1972년에 루브르 동편, 대학살의 시작을 알렸던 생 제르망 록세흐아 성당을 가로 지르는 길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라 바뀌게 된다. 꼴리니의 살해를 시작으로 대학살은 전국으로 번져 나갔고, 샤흘르는 9세는 이 끔찍한 광경을 보고 즐기고 싶어 거리를 나서게 된다. 그러나 학살의 악몽으로 밤마다 시달렸고 이를 잊기 위해 술과 쾌락에 빠져 지내다가 2년 후 1574년 방센 성(Château de Vincennes)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독일인이었던 배신자 벰므는 훗날 위그노들에게 체포되었고, 라 로셸(La Rochelle) 시민들은 그를 교수형에 처한 후 네 토막으로 자르려 했으나 Bretanville에 의해 살해된다. 한편 까뜨린은 남편 앙리 2세의 죽음 이후 세 명의 아들들이 왕이 되는 영광을 누리지만 그 세 아들들의 잔혹한 죽음을 목격해야 하는 비운의 여인이다. 그녀는 이태리 문화를 프랑스에 도입하는 일에 많은 공헌을 세웠지만, 너무나 많은 이들의 피를 흘리게 한 채 1589년 만 7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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