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34] 저물어 가는 깔뱅의 인생
1. 깔뱅의 검소한 생활
적지 않은 사례를 받았던 깔뱅은 평생 남의 집에서만 살았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자주 여러 곳을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깔뱅이 살았던 집은 주인인 Fresneville가 쥬네브를 얼마동안 떠나게 되자 그 집에 살게 되었지만, 그의 요구로 다시 옆집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그러다가 2년 후 쥬네브의 영주가 Fresneville의 집을 구입하면서, 깔뱅은 다시 그곳으로 이사하여 죽는 날까지 그곳에서 살게 된다. 장기간 집을 비우게 되는 경우에는 동생 앙뚜완(Antoine)이 그곳을 머물게 된다. 그의 집은 정원 하나가 있었으며 호수와 산이 내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였고, 깔뱅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들을 보면서 찬양하곤 하였다.
1548년에 그가 살고 있던 집을 수리하면서 그가 갖고 있던 재산 목록들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의 검소한 모습을 엿보게 된다. 단조롭게 생긴 나무 침대 두 개, 호두나무로 만든 탁자, 찬장 두 개, 상자 한개, 팔걸이 없는 등받이 의자 하나, 몇 개의 걸상, 팔걸이 등받이 나무 의자, 독서용 작은 책상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가구들은 깔뱅의 소유가 아니라 집 주인인 영주의 것이었다. 깔뱅은 가구들을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 영주로부터 이것들을 구입하고자 하나 영주는 나무로 만든 가구들을 팔기를 거절하므로, 쿠션과 침대 커버, 주석으로 된 소품 몇 가지를 구입하였다. 이런 것들이 깔뱅의 재산 목록의 전부이다. 하지만 그는 이 집에서 별 불편함 없이 살았다. 그러나 그의 비서 프랑수와(François Baudoin)가 도벽으로 인해 고생을 하곤 했으며, 동생 앙뚜완의 하인 삐에르(Pierre Daguet)가 앙뚜완의 부인과의 불륜을 맺음으로 깔뱅은 매우 힘들어 했다.
2. 돌아보는 그의 인생
관절염, 요도 결석, 치질, 복통, 위장병, 편두통 등 여러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했던 깔뱅은 그의 마지막 6개월 동안 의사의 요구로 계란과 작은 잔의 포도주로만 점심 식사를 하였다. 설교를 중단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회수가 잦아지므로 설교도 중단하여야 했다. 그의 재산은 동생과 조카, 그리고 학교와 가난한 자들을 돕는 단체에다 나누어 주었다.
1564년 4월 28일 금요일, 깔뱅의 요청으로 쥬네브의 모든 형제 사역자들이 연락받고 그의 방에 모여 들었다. 그리고 깔뱅의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며 개혁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그는 고백하였다.
“내가 처음 이 교회로 부임했을 때, 교회에는 설교가 전부였던 상태였다. 그리고 우상을 찾아내어 불태웠지만 개혁의 그 어떤 모습도 찾아 볼 수 없어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며 이 집에서 지내왔는데, 어떤 날 저녁에 집문 앞에서 화승총으로 5-60번의 총을 쏘면서 나를 조롱하곤 했습니다. 겁 많은 어린 아이와 같은 내가 얼마나 많이 놀랐을 것인지 상상이 되나요?…
스트라스부르에 있을 때 다시 청빙받아 사역을 시작하려 했을 때에도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 22:16절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의 말씀처럼, 개들(깔뱅의 적대자들)은 나에게 ‘불쌍한 놈! 불쌍한 놈’이라 소리 지르며 내 뒤를 쫓아다녔고 내 다리와 내 옷을 물어 뜯었습니다.…
나는 많은 결점들을 갖고 있었기에 여러분들은 그런 나를 인내하면서 수용해서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했던 모든 것들은 실상 가치 있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건데 내가 한 모든 일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악함에 대해 항상 아파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려는 뿌리가 내 마음 속에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깔뱅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였고, 각 사람의 마음 속에는 가슴 아픔과 슬픔을 느꼈다. 5월 19일 저녁부터 그의 허리 위로는 전혀 움직일 수 없었고, 정신은 약해졌다. 짧은 호흡이 많아지고 계속된 그의 기도 소리는 오히려 간단한 탄식과 같았으나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그의 좋은 믿음과 그가 가졌던 경험의 증거를 볼 수 있었다.
5월 27일 밤 8시 경에 깔뱅이 운명 직전이라는 갑작스러운 소식을 전해 받은 후임자 베즈와 많은 형제들이 도착했을 때에 그는 평온한 상태로 이미 운명한 상태였다. 그 시간에 그 날의 태양은 기울었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한 가장 큰 빛은 하늘로 돌아갔다.
1564년 5월 28일 오후, 봄 햇살 아래 쥬네브 근처 Plainpalais 공동 묘지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몇일 전에 파 놓은 구덩이를 향하고 있었다. 이 작은 그룹에는 후계자 베즈와 고인의 형제 앙뚜완(Antoine)과 여동생 마리(Marie)와 몇몇 친근한 사람들이 있었다. 쥬네브 시민들은 유언에 따라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 어떤 예식도, 설교도, 찬송도 없었다. 벌려진 땅 속으로 간단한 수의로 싸여진 그의 시신은 서서히 내려졌고 마침내 그의 수고로운 몸은 땅에 묻혀졌다. 꿰멘 커다란 침대보가 관을 대신하였다. 유언에 따라 무덤도, 비석도,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으로도 기념할 만한 것을 세우지 않았다.
무덤의 위치를 알리는 표시도 만들지 말며 많은 사람들이 묻히는 공동묘지에 묻을 것을 요구했기에, 그가 죽은지 몇 달 뒤, 외국 학생들이 그의 무덤을 방문했을 때에 그의 무덤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18세기에 와서 점점 더 많은 외국인 방문객들의 요구에 따라, 무덤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도록 쟝 깔뱅이라는 이름의 이니셜 ‘J.C’를 작은 돌에 새겨 그의 무덤임을 알리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네덜란드 사람이 깔뱅의 묘를 어렵게 찾아 확인하고 이니셜을 새겼다고도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재의 깔뱅의 무덤의 그의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20세기 초반에 무덤을 새롭게 단장하였고 깔뱅의 삶을 아주 짧게 설명하는 안내판이 추가되었다.
현지에 계신 목사님에 따르면, 깔뱅의 무덤을 새롭게 단장한 한 변호사는 몇 제네바 시민들에 의해 무덤을 새로 꾸민 것은 고인의 유지를 무시한 처사라며 고소를 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4백년이 훨씬 넘은 무덤을 단장한 것에 대한 판결을 내려야 하는 판사는 “고인의 유언을 어기는 것이 법적 저촉을 받는 것인지는 판례가 없기에 앞으로 계속 연구해보겠다”는 애매한 판결로 이 사건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