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35] 잊혀지기를 원했던 깔뱅
바울이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깔뱅 역시 그의 사역의 결과는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이었으며 자신은 그 일하심에 무가치하였음을 고백하였다. 그러하였기에 그가 죽은 후 그를 기념하는 그 어떤 것들도 세우지 말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것은 그가 드러내고 싶었던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 말씀 만이 오직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겨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쥬네브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은 ‘쥬네브는 깔뱅의 도시’이기에, 골목 골목들을 거닐다 보면 그의 흔적들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를 갖지만 그 어떤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실제 쥬네브에는 흉상이나 동상, 그 어떤 기념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행인 것이 그렇지 않았다면 ‘성지’라는 이름으로 장사꾼들의 상술만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깔뱅의 모습은 유일하게 바스띠옹 공원에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곳 역시 깔뱅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쥬네브 종교 개혁을 기념하기 위한 역사 조형물일 뿐이다.
그렇다고 쥬네브 시민들이 깔뱅의 유언을 지키기 위하여 조형물을 만드는 일에 침묵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깔뱅 출생 5백주년을 맞이한 오늘까지 그 동안 깔뱅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물을 세우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깔뱅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마음을 바꾸어 놓는 무모한 행동임이 분명하다.
19세기에 들어와서 프랑스 종교 개혁가 깔뱅을 기념하기 위한 거대 동상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깔뱅 사망 250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814년에 박애주의자이며 평화주의자였던 장 자크(Jean- Jacques de Sellon) 백작과 몇 정치인들은 눼브 광장(la place Neuve)에 개혁자의 동상을 세우려는 운동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당시 쥬네브는 더 이상 개신교의 도시가 아니었기에 가톨릭과의 갈등을 염려한 쥬네브 정부는 예산에 대한 투표 자체를 거부하므로 무산되고 말았다. 원래 계획 안에는 깔뱅과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마르틴 루터, 쯔빙글리, 기욤 파렐 등 당시 개혁자들의 얼굴을 함께 넣을 계획이었다. 정부의 매정한 거절에 약간의 분통함을 가졌던 장 자크는 rue des Granges에 있는 자신의 저택 테라스에 커다란 형상과 함께 피라미드 형 묘석을 세웠다. 이 작품은 눼브 광장에서 오래된 한 저택 성벽에 건립된 정원을 자세히 보게 되면 동상을 볼 수 있다. 1955년에 쥬네브 정부가 이 건물을 인수하여 방문객을 받고 있다.
그 후 역사학자들과 장 헨리(Jean-Henri Merle d’Aubigné) 목사의 제안에 따라 1861년 9월 쥬네브 복음주의 연맹은 회의를 열고, 1864년에 깔뱅 사망 3백주년 기념으로 레만 호숫가에 거대한 상을 세우기로 합의한다. 깔뱅의 형상 안으로 좁고 구불구불한 계단을 만들고 그 계단을 따라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되면, 레만 호수의 정면과 관광객들이 타고 다니는 증기선 그리고 신비의 산 몽블랑을 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깔뱅을 기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들로 인해 다시 수정되었고, 14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종교 개혁 홀과 도서관을 갖춘 기념 건물을 세우자는 쪽으로 계획안이 바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은행가 알렉상드르(Alexandre Lombard)의 영향력 아래 복음주의 건물을 만들어 ‘종교 개혁 홀’이라 명명하며, 건물을 소개하는 표지판에 개혁자들의 삶을 기록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건물은 rue du Rhône와 boulevard Helvétique가 만나는 지점에 1867년 9월에 시공하였고, 2000석의 큰 공간과 여러 개의 작은 홀로 이루어진 건물을 마침내 만들게 되었다.
완공 후 처음 얼마간 동안 종교 회의, 인기 있는 콘서트, 기도회를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여러 홀 가운데 작은 한 홀에는 깔뱅을 비롯한 개혁자들의 책들이 보관된 깔뱅 도서관도 있었다. 그러나 온방이 되지 않아 추위로 공간 사용의 문제점이 있어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종교 개혁 역사 박물관 협회의 공간으로 사용되다가 1960년대 부터는 건물 자체를 개혁 역사 연구소에 넘겨 주고 만다.
그후 ‘종교 개혁 홀’은 1년에 한 번 국가 위원회 회원들을 수용하는 장소로 사용되었고, 1950년대 이후부터는 종교적인 것과 달리 인기 가수들의 공연장과 영화와 텔레비전 녹화장으로 사용되었다. 다른 홀들은 영화관으로 바뀌고 말았다. 크기만 하고 사용하기에 불편한 이 건물을 구매하고자 하는 구매자가 없어 결국 1969년에 파괴되며, 종교 개혁 기념 건물은 근처에 새로 건설되어 지금까지 종교적인 일을 계속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깔뱅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슬픈 일이 아니다. 슬픈 것은 그의 가르침을 잊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를 기념하는 동상을 만들고 건물을 세운다 해서 그의 가르침이 기억되게 하는 것 또한 아니다.
민감한 반응일지 몰라도 최근 깔뱅 무덤을 새롭게 꾸민 작은 변화에도 개운치 않는 약간의 씁쓸함이 있다. 사실 한 시대의 영웅처럼 대접 받아야 할 그였지만 평토장에 아무런 표식도 남기지 못하게 했던 그의 무덤을 방문할 때마다 잔잔한 감동과 함께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주곤 했었다. 하지만 새롭게 단장된 그의 무덤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유감스럽게도 깔뱅을 연구하는 한국 학자들에 의해 최근 깔뱅 동상을 세우는 일들이 빈번해지고 있다. 많은 재정을 들여 그것도 매우 친절하게 프랑스까지 방문하여 그의 동상을 세워주며 세계에서 몇 번째 깔뱅의 동상이라고 말한다. 물론 깔뱅이 잊혀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를 기념하기 위한 순수한 의도이겠지만, 깔뱅이 그토록 원치 않았던 일을 무엇을 위해 해야만 하는지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깔뱅을 기억할런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공원이 많기로 유명한 프랑스에는 그 많은 공원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동상들이 즐비하게 있다. 그 의미 없는 동상의 대열에 깔뱅을 넣기보다, 잊혀지기를 원했던 ‘깔뱅’의 그 순수한 마음이 다른 방법으로 표현되었으면 좋겠다.
인간이 기념되고 숭상되는 일에 온 몸을 바쳐 반대하며 형상을 깨뜨리는 일에 앞장 섰던 깔뱅인데, 그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후손들에 의해 그의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왠지 걸맞지 않는 모습인 것 같다. 그럼에도 꼭 그의 상을 세우려고 한다면, 그의 동상을 세우기 전에 깔뱅이 무너뜨렸던 무수한 형상들을 다시 세우는 일이 선재되어야 하지 않을런지…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갈 2:18)”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