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열 교수가 읽는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 100년 평가(3)’
‘선교의 꽃은 사람을 키우는 것’이라고 한다.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 Moffett, 1864-1939) 선교사는 한국 땅에서 ‘프로젝트’가 아닌 ‘사람’을 길러내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1890년 26세의 젊은 나이에 내한(來韓)하여 영혼구령에 앞장서다가 1904년 평양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1924년까지 20년간 수많은 현지인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07년에 목사 안수를 받은 길선주 목사이다. ‘토종 한 명이 선교사 100명보다 낫다’는 말이 있듯이 길선주 목사는 일생 동안 약 800명의 목사와 전도사를 세워 일꾼을 길러내는데 박차를 가하고 60여 교회를 개척하였다. 한 사람의 현지인 지도자가 길러지게 되면 선교사의 몫을 10배, 20배 이상으로 감당하는 것을 마포삼열 선교사는 본 것이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처럼 평생을 한국에서 보내며 한국인을 좋아했고 한국인을 세우는데 앞장섰다.
놀라운 것은 마포삼열 선교사가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 때 한국대표로 참석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한 지 20년만의 일이었다. 비록 1907년 내한하여 평양대부흥운동을 직접 목격한 존 모트(John R. Mott)에게 답방 형식으로 이루어졌지만 ‘독립군’으로 선교하지 않고 함께 연합하는 선교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에딘버러대회에서 당시 선교의 이슈와 흐름을 파악하고 타문화권에서 선교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한국선교는 어느 위치에 와 있는지 확인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에딘버러대회에 참석한 자는 마포삼열 선교사를 포함하여 15명이었는데, 아담스(James E. Adams), 에비슨(O. R. Avison), 버크몰(H. O. T. Burkmall), 푸트(W. R. Foote), 포사이더(W. H. Forsythe), 게일(James S. Gale), 질레트(P. L. Gillett), 해리스(M. C. Harris), 존스(George Heber Jones), 녹스(Robert Knox), 레이드(W. T. Reid), 롭(Alex F. Robb), 언더우드(H. G. Underwood), 윤치호(T. H. Yun)이다.
10일 동안 진행된 에딘버러대회는 오전과 오후에는 8개 위원회가 각 선교보고와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고 저녁에는 특강으로 진행됐다. 제1위원회에 소속된 마포삼열 선교사는 오후 발제자로 나서 1,200명의 대의원들 앞에서 한국인의 자립선교를 극찬하였고, 한국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외국의 돈이 투자되지 않는 나라라고 보고하였다. 그는 이 저력은 인도, 중국, 만주 선교와의 차이점이라고 강조하며 “한국인들은 스스로 우리 선교사에게 와서 ‘여러분은 우리에게 영적인 부담감을 주었지만, 초기에 우리가 더 많은 돈을 달라는 요구에 반응해 주지 않은 것에 감사하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우리는 한국에서 해외선교회가 현지인 지도자를 돕기 위해 돈을 쏟아 붓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한국교회의 ‘자립’(self-supporting)을 널리 알려 화제가 되었다. 선교 25년의 짧은 역사를 지닌 한국교회가 자립한다는 사실은 에딘버러대회에 참여한 대의원들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심어주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제1위원회의 ‘비기독교세계를 위한 복음전달위원회’가 당시 한국선교현황을 10페이지 분량으로 소개했다. 이 보고서는 크게 3개 영역으로 복음을 받은 한국인의 특징, 현재 한국에서 하고 있는 사역들, 한국에서 이루어진 사역들을 소개하며 한국교회의 성장을 보고하였다. 당시 한국은 960만명의 인구 가운데 20만명이 성도로, 기독교가 급성장하였다. 기독교가 소개된 지 불과 25년 만에 성도가 인구의 2.1%를 차지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다음은 한국에서의 주요 사역이 보고되었는데 초기 한국교회에는 해외의 8개 교단이 선교활동을 하였고, 307명의 선교사와 23개의 선교부가 활동하면서 각 교단간의 선교지분할정책(comity)이 너무나도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선교부는 각 도마다 하나씩 있는데 급속하게 성장하는 편이었고 평양은 타 지역에 비해 가장 활발하게 성장하였다. 예를 들어 평양 장대현교회의 경우 16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성도 수가 2,500명이나 되고 수요기도회에만 1,100명이 참석하는데 단일기도회로는 세계 최고라고 했다.
특히 이 보고서는 자립은 한국인의 특성이며 한국교회의 80%가 자립한다고 보고하여 참석한 대의원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 보고서에서 한국교회는 헌금하는 일에 열정적이어서 연간 2만5천 파운드가 넘는 액수를 헌금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국의 가장 작은 동전 한 닢이 영국 페니(1/100 파운드)의 1/4 가치였는데 이는 대단한 헌금액이었다. 한국 성도들은 또한 예배당을 짓기 위해 자신의 소를 팔거나 자기 집을 저당 잡아 융자금을 받기도 했다. 한국 성도들은 예배당이나 교회학교 건물을 짓는데 헌신적이며 목사와 교사를 돕는데도 탁월하다고 하였다.
한편 윤치호는 송도 대표이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에딘버러대회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제1위원회에 소속되어 오전 발제자로 나서 한국선교를 보고하였다. 윤치호는 한국은 이제 ‘위대한 추수의 때’가 도래했다며 “25년 전에는 단 한 명의 선교사와 한 명의 크리스천도 없었지만 유럽과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의 수고와 땀으로 20만 명의 성도로 성장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책 가운데는 성경이 가장 많이 읽혀지는데 영국성서공회가 이에 큰 수고를 하였다”고 고마움을 표하기도 하였다. 윤치호는 또한 급작스런 회심을 경계하였는데, 그 이유는 선교사수가 부족하여 회심자들을 돌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만큼 초기 한국교회의 신앙교육은 선교사 의존도가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딘버러대회가 열릴 당시 한국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기 두 달 전이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척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피터 와그너(C. Peter Wager) 박사가 ‘독립투쟁이 일어나는 지역에서는 오히려 복음의 수용성이 높다’고 주장했듯이 한국이 그러했다. 소망을 상실한 한국인들에게 복음은 보약과도 같아 새 힘을 불어 주었다. 그 중심에 바로 마포삼열 선교사가 있었다. 그는 선교 시야를 한국에만 고정시키지 않고 세계로 넓혔다. 에딘버러대회에 참석한 그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확인할 수 있었고 한국선교를 어떻게 감당해 나가야 할지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에딘버러 100주년을 맞이하여 현재 해외에 파송된 2만 명의 한국선교사들이 자기 선교지에만 파묻히지 않고 시야를 넓혀주길 바란다. 10년, 20년을 내다보는 눈이 있어야 연합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1. 경쟁을 뛰어넘어 함께 연합하는 선교사대회
2. 세계복음화를 꿈꾼 존 모트
3. 에딘버러대회에서 한국선교를 보고한 마포삼열 선교사
4.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의 교훈
안희열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선교학 교수
세계선교훈련원(WMTC) 원장
한국복음주의선교신학회 수석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