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사람, 복음주의 목사 김익두
한국 초기 장로교회가 낳은 유명한 목사로서 세간에 알려진 김익두(金益斗)는 1874년(고종 11년) 11월 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에서 아버지 김응선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대단한 부의 상징인 기와집에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힘써 구제하며 노인 공경에 힘쓴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김익두는 어려서부터 인근에 있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열심히 공부했고, 10살이 돼서는 어려운 사서삼경을 외울 정도로 총명한 아이로 소문이 났다. 동네 사람들은 총명한 김익두를 장래가 촉망된 거목으로 생각했다. 16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낙방하고 말았다. 합격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부모는 몹시 실망했다. 아들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던 아버지는 몸져 자리에 누웠고, 그 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청년 수재 김익두는 스스로 살아 나가야 할 인생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다.
청년 김익두는 불교 사찰에 들어가 얼마 동안 불도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회론을 포함한 불교의 어려운 교리를 도저히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어서 사찰을 떠나고 말았다. 사찰에서의 생활은 그의 인생에 혼란만 가중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그동안 가슴에 품었던 사치스러운 인생철학 및 가치관을 모두 던져 버리고, 치열한 생존 현장인 시장에 들어가 장돌뱅이가 됐다.
청년 김익두는 거친 장돌뱅이 생활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생전 아버지에게서 듣고 배운 정직과 진실은 가슴에 늘 품고 살았다. 한번은 시장에서 일하다 묵직한 돈 보따리를 길가에서 주워 주인에게 돌려준 적도 있었다. 주인은 안악읍에서 제법 큰 상점을 운영하는 부유한 사람이었다. 주인은 정직한 김익두를 자신의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는 대형 상점의 지배인이 돼 나름대로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생활이 안정된 김익두는 이웃 마을에 사는 착한 처녀와 결혼해 아름다운 가정을 이뤘다. 그런데 사기꾼 친구를 그만 잘못 만나 선 빚 보증 때문에 힘써 모았던 모든 재산과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까지 하루 아침에 날리고 말았다. 김익두는 다시 한번 인생에 회의를 크게 느끼기 시작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날마다 길가에서 술주정을 일삼으며, 이웃들과 싸우는 망나니로 변해 버렸다. 이웃 사람들은 그런 김익두를 부잣집 총명한 아들로 보지 않고, 비전 없는 동네 깡패로 인식했다.
이후 27세 되던 1900년 봄, 김익두는 절친한 박태환의 전도로 안악군에 있는 금산교회에 나가게 됐다. 그때 미국인 선교사 스왈렌(Swallen, W. L.)의 ‘영생’이라는 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그는 신약성서를 1년에 100번이나 독파하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점차 변화됐다. 1901년 7월에는 부인,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서 스왈렌 선교사에게 물세례를 받았다.
그는 1901년 10월 재령교회 전도를 위해 헌신하라는 스왈렌 선교사의 권유를 받고 순종함으로 전도 사역에 첫 걸음을 내디뎠다. 그곳에서 1백명 넘는 사람들을 전도해 성도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스승인 스왈렌 선교사로부터 실력과 신앙을 인정받은 김익두는 1903년 신천 지역 개척 전도사로 파송됐다. 신천에서도 매일 새벽기도를 드리며 신·구약 성경을 하루 2장씩 숙독하고, 하루 3번 이상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스스로 신앙의 원칙을 지켜 나갔다. 그는 성경을 늘 들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읽었으며, 길을 걸을 때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습관이 생길 정도였다.
191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에는 염수동교회에 모인 제4회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소위 신유부흥회를 다니게 됐다. 1919년 현풍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중 아래턱 기형환자 박수진이 나았고, 중풍병자 김경애 및 30년간 종기로 고생하던 최석황도 집회 중 치료됐다. 이후 그가 인도하는 집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교회당 밖에서 멍석을 깔고 집회에 참여할 정도였다.
승동교회에서 집회할 때는 당시 19세의 김재준이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됐으며, 1921년 웅천집회에 참여한 주기철도 은혜를 받고 목사가 돼 순교의 종이 됐다. 그가 인도한 부흥집회는 만주와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776회, 설교는 28,000여회, 그를 통해 신설된 교회는 150여곳, 집회에 참여해 목사가 된 사람은 2백여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러나 1926년 5월, 그가 섬기던 남문밖교회 신진 세력들이 그를 미신적 신앙 소유자 및 거친 언어를 구사한 무식한 목사로 정죄해 배척하기도 했다. 일제 때 신사참배를 한 목사로도 오늘날까지 낙인찍혀 있다. 그럼에도 목사 김익두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성경을 성경으로 믿었던 한국의 복음주의 목사였다.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구령의 열정은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흠도 많고 실수도 많이 한 김익두 목사였지만, 그가 품은 기도와 성경사랑 및 구령의 열정은 오늘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