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낳은 최고의 복음주의 목회자
한국이 낳은 최고 최대의 복음주의 목사, 한경직(1902-2000)은 1902년 12월 29일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전업 농부인 부친 한도풍(韓道豊)과 모친 청주 이(李)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 세워진 자작교회와 진광학교(선교사 마포삼열 설립) 및 평북 정주에 위치한 오산학교(이승훈 설립)는 한경직에게 새로운 기독교 신앙과 사회 및 민족 사랑을 일깨웠다.
졸업 후 그는 첨단 과학을 터득해 부강한 민족국가를 세우겠다는 야무진 비전을 가슴에 품고 평양의 숭실대학 이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시절 이승훈 조만식 마포삼열 그리고 방위량 등 당대의 탁월한 기독교 지도자를 만나,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 한경직을 미국 유학의 길로 인도하여 폭넓은 학문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유학생 한경직은 미국 켄사스주의 엠포리아 대학에서 역사철학 및 심리학을 공부하여 문학사 학위를 받고,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한다. 신학교를 마친 후 예일대에 입학하여 박사학위 과정을 공부하려 했는데, 갑작스런 폐결핵으로 꿈이 좌절된다. 뉴멕시코에 있는 요양원에 거처하는 동안 목회와 민족봉사의 길을 택할 것을 서원하고, 병이 치유되자 학문을 포기하고 곧바로 귀국하여 사회를 위한 봉사를 시작한다. 모교인 숭실대학 교수가 되어 교육으로 봉사하려고 했지만 일본 경찰의 반대로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전도와 교육, 사회봉사를 3대 주요한 목회지침으로 정하고 성경적 교회를 꿈꾸며 교회를 세워 나간다. 그가 설립한 고아와 노약자를 위한 보린원은 성경적 교회의 모델을 새롭게 조명한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의 상대국인 미국에서 공부한 것 때문에 일본 경찰의 반대로 목회마저 할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보린원에서 광복이 될 때까지 농사일을 하며 고아들과 함께 허드렛일을 하게 된다.
일제의 철수로 인한 치안 공백을 메우기 위해 평안북도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기도 했고, 민주 사회 건설을 위해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하기도 했다. 그런데 소련군 진주와 더불어 내려진 체포령은 그를 월남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월남 이후 피난민들을 위해 영락교회를 세워 예배를 드렸으며, 피난민들이 재회할 수 있도록 적극 배려한다. 1973년 원로목사로 추대되기까지 그는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일생의 사역을 이루어간다.
교회 강단을 통해 수많은 성도들을 복음적으로 양육했으며, 학원·군·농촌·도시·공장지대 및 그늘진 곳에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5백여 교회를 세운다. 대광중고교·보성여중고교·영락중고교·숭실대 및 서울여대 등을 설립하거나 재건하여 인재 양성에 적극 기여한다. 해외 기독교인들과 연합하여 선명회를 조직하고 부모를 잃은 전쟁 고아를 보살피기도 한다. 군복음화·외항선교·사랑의쌀 나누기 등 사회 복음사역을 주도했고, 한국기독교 1백주년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70년대부터는 경찰 복음화에 심혈을 기울인다. 템플턴상 상금 1백만불을 북한 선교를 위해 헌금하여 북한선교 사역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한경직 목사는 평생을 피난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역했으며, 아시아·아프리카·유럽 및 미주 지역에 이르는 해외선교 사역에도 열심을 다한 세계 선교의 상징적 인물이다. 수많은 교육기관과 사회봉사 기관을 설립하여 교육자로, 사회봉사자로 사회 및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국가 위기 때는 우리 사회의 나아갈 길을 적극 제시하며 사회현실 문제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한경직은 한국이 낳은 탁월한 복음주의 목사로, 교회의 범위를 교회당 내로 한정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 세계를 복음의 현장으로 삼고 무지한 성도들을 깨우치는 폭넓은 교회론 정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21세기를 주도하는 작금의 한국교회는 위와 같은 한경직의 폭 넓은 교회론 및 교회 사역을 잇지 못하고 있다.
1세기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교회가 아닌, 세상 로마가 만든 길과 그리스가 이뤄놓은 헬라어를 적극 사용해 전 세계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 21세기에 사도 바울이 이 땅에 태어난다면 무엇으로 복음을 전할까에 한국교회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경직이 보여준 교육 및 시회복지 사역이 21세기 교회가 나아갈 복음주의 지도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