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총칼 고문에도 지조 지킨 참 목자 주기철
한국교회가 낳은 자랑스런 참 목자 주기철은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복부리에서 주현성의 4남 3녀 중 넷째아들로 태어난다. 1905년 한국을 침탈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주기철의 친척 주기효는 1906년 대한의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고향에 개통학교를 세운다. 어린 주기철은 학교에 입학해 투철한 민족정신과 탁월한 민족애를 마음껏 키운다. 개통학교 7년 과정을 성실히 끝낼 무렵, 주기철은 부산에서 춘원 이광수의 애국 강연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 급기야 이광수가 교장 대리로 있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로 진학해 민족 지도자인 이승훈·조만식 등의 인물을 만나 철저한 민족교육과 투철한 신앙교육을 받는다.
1916년 오산학교를 우수하게 졸업한 뒤 그는 같은 해 4월 연희전문학교 상과로 진학한다. 입학한지 몇 달이 안돼 고질병인 안질이 심해지자 학업을 중단하고 치료차 낙향한다. 그는 고향에 있는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청소년들을 가르쳤으며, 야학과 청년운동에도 정열을 쏟는다. 이때 김해교회 이기선 목사의 중매로 신실한 신앙인 안갑수와 결혼해 가정을 이룬다.
이후 1920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김익두 목사가 강사로 나선 심령부흥회에 참석해서 성령체험을 깊게 한 뒤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1922년 3월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 당시 매우 유명한 마포삼열, 배위량, 왕길지, 곽안련, 나부열 등 훌륭한 신학교수를 만나 성경적 보수 신학을 철저히 교육받는다. 신학교 재학 시절 양산읍교회 전도사로 성실히 사역했고, 1925년 12월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뒤 부산 초량교회 위임목사로 청빙된다.
1936년 담임한지 10년만에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평양 산정현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한다. 이때 일제는 신사참배라는 악한 무기를 교회와 성도들에게 들이대면서 한국교회의 목을 죄었다. 일제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체포 구속하며 잔인하게 고문하기 시작한다. 결국 평양에서 열린 제27회 장로회 총회에서는 온 교회가 신사참배를 수용하기로 공식 결의한다. 목사들 대부분이 신사 앞에 무릎을 꿇고 신앙양심을 저버렸다. 그러나 지조있는 신앙인 주기철과 그를 따르는 소수의 목사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군 총칼 앞에서도 당당히 맞선다.
이로 인해 주기철은 1938년부터 1944년까지 5차례, 총 5년 4개월간 감옥생활을 한다. 그는 옥중에서 몽둥이찜질, 채찍질, 쇠못밟기, 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춧가루 뿌리기, 발바닥 때리기 등 사람으로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킨다. 주기철은 구속과 석방을 반복해 안질, 폐병, 심장병 등으로 몸이 매우 약화돼 점점 폐인이 되어갔다.
마지막 5번째로 형무소에 끌려가 갇히기 전 그는 자택에서 늙은 노모와 처자 및 20여명의 산정현교회 성도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한다. “우리 주님 날 위해 십자가에 고초 당하고 돌아가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 체 하오리까. 나에겐 오직 주님을 향한 일사각오의 신앙만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교회에 온전히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투옥된 이후 일제의 혹심한 취조와 고문을 견디다 못해, 그는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평양형무소에서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정부는 1963년 그를 독립유공자로 삼고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다.
인간의 안위보다 하나님과 성경을 모든 삶에서 최고 우선순위로 생각했던 주기철은 오늘까지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의 귀감이 되고 있다. 편리와 편의주의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건 듯한 21세기 한국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참 목자다. 하나님의 복음을 몸으로 사수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아갈 지조 있는 현대판 주기철 목사를 한국교회는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