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9일, 느헤미야 2장 1~8절
“25년 전에 온누리교회를 시작할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환경이 너무나도 많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비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성전을 재건하는 비전을 가진 것처럼 우리의 비전은 변하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의 환경이 변했지만 우리의 비전은 더 강렬하게 빛을 낼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응답된다
사람들은 기도할 때 내가 원하는 시간,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응답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기도 응답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도하자마자 즉시 응답되는 것입니다. 갑자기 암이 없어진다든지,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일정한 시간이 되어야 응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25세 때에 약속의 씨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태어나기까지 25년이 걸렸습니다. 여러분, 25년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변치 않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킬때 홍해를 건너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합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25년 동안의 기다림을 통해 기다림의 훈련을 시켰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순종하도록 훈련을 시켰습니다.
세 번째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에 응답될 수도 있지만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동안에는 응답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는 통곡하며 기도한지 4개월 만에 응답받았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일시적으로 갑자기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주변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고 가까운 사람들을 살펴보면 이것이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건가 사람이 움직이는 건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응답의 표증
1절부터 3절까지입니다. “아닥사스다 왕 20년 니산 월에 나는 왕에게 술을 따르는 일을 맡았기에 술을 가져다 왕에게 따라 드렸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내가 왕 앞에서 슬픈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왕이 내게 물었습니다. ‘네가 아프지도 않은데 네 안색이 왜 그리 슬퍼 보이느냐? 마음에 근심이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무척 두려웠지만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께서는 만수무강 하옵소서! 제 조상들이 묻혀 있는 성이 폐허가 됐고 그 성문들이 불에 타 허물어졌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이 세 구절을 읽을 때 마음을 열고 보면 하나님의 응답의 표증이 많이 나타나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습니다. 하루빨리 불에 타서 폐허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을 건축하고 싶은 조바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 참다가도 힘들면 사람을 찾습니다. 권력 있는 사람을 찾아가고 싶은 유혹이 강합니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술 따르는 일을 맡았습니다(1절). 기도하기 전부터 맡았는지, 기도한 이후에 맡았는지 모르지만 문맥상으로는 최근에 맡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위치에서 이동하게 될 때는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지, 내가 좋아서 내 이익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인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 당시 술 따르는 관원은 단순히 자기가 술을 먼저 마셔보고 독이 없으면 왕에게 드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술과 음식을 먹을 때 대화의 상대가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면 국정을 논하게 되고 정보를 전해 주게 됩니다.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환경입니다. 느헤미야가 술 따르는 관원이 안됐다면 어떻게 왕하고 얘기할 기회가 있겠습니까?
술 따르는 관원이었던 느헤미야는 먼저 왕에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왕이 먼저 느헤미야의 얼굴을 보고 슬픈 기색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1~2절). 왕 앞에서 얼굴색이 좋지 않아 혹 왕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쫓겨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왕이 먼저 물어봤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계속해서 수동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얼굴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동하고 싶지만 참고, 말하고 싶은데 참고, 소리 지르고 싶은데도 참는 사람이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면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이 느헤미야의 기도를 다 들으셨고 필요한 때에 움직이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준비된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
사람의 얼굴에는 영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설교자나 크리스천들을 보면 똑똑하고 아는 것은 많은데 그 얼굴을 쳐다보면 기도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모습이 그 얼굴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이 많고, 영적으로 고갈돼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열정이 있고 교회사역은 열심히 하고 능력도 있는데 겸손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람들에게 알려고 광고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열정은 많은데 자기 수준을 계속 넘어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합니다. 이런 사람은 일도 말도 서둘러 하기 때문에 실수가 많습니다.
느헤미야는 왕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 전까지 침묵하며 기다렸습니다. 느헤미야는 지혜롭고 준비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5절입니다. “왕이 내게 물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때 내가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왕에게 대답했습니다. ‘왕께서 기뻐하시고 종이 왕께 은총을 입었다면 왕께서는 저를 조상들이 묻혀 있는 유다 땅으로 보내 그 성을 다시 건축하게 하소서.’”
여기 보면 이제는 느헤미야가 급한 게 아니고 왕이 조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왕이 자꾸 물어보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주저하지 않고 용기를 냈습니다. 용기라는 것은 이럴 때 필요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평소에 기도하면서 준비를 많이 했기 때문에 왕이 묻자마자 “저를 조상들이 묻혀 있는 유다 땅으로 보내 그 성을 다시 건축하게 하소서”라고 대답합니다. 준비된 사람은 언제, 어느 때나 대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침묵할 때도 있지만 때가 되면 용기 있게 말합니다.
침묵하고 기다리는 리더십
유다 땅으로 가서 성을 다시 건축하게 해달라는 것은 엄청난 요구입니다. 왜냐하면 아닥사스다 왕이 14년 전에 거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14년 전에 성을 재건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모함으로 인해 반란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왕이 뒤바꾼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따라서 느헤미야가 요청한 것은 왕의 입장에서 매우 곤란한 요청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비전과 리더십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을 정도로 기도하면 비전이 생깁니다. 책만 읽는다고 해서 비전이 생기지 않습니다. 생각한다고 생기지 않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내 평생에 이뤄야할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비전이 있을 때 리더십이 생깁니다. 비전도 없는데 무슨 리더십이 생기겠습니까.
느헤미야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세 가지 리더십이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리더십입니다. 두 번째, 침묵하고 기다리는 리더십입니다. 세 번째, 지혜롭고 용기 있고 준비된 리더십입니다. 세상의 리더들은 세 가지 리더십 중에서 한 가지만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스로 리더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리더였습니다.
6절입니다. “그때 왕 옆에 왕비도 앉아 있었는데 왕이 내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다녀오려면 얼마나 걸리겠느냐? 언제쯤 돌아오겠느냐?’ 왕이 나를 보내기를 허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왕에게 기한을 정해 말했습니다.”
왕과 왕비가 있다는 것은 공식석상이라는 뜻입니다. “언제쯤 돌아오겠느냐”라는 질문은 왕이 이미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느헤미야는 거침없이 기한을 정해 말했습니다. 준비된 사람만이 거침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비전에 대해 생각하라
느헤미야의 비전은 성전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진 현상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7절입니다. “내가 다시 왕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다시 왕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왕께서 기뻐하신다면 제가 유다에 도착할 때까지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유프라테스 강 건너 총독들에게 보여 줄 친서를 써 주시겠습니까?’”
느헤미야의 마음속에는 이미 성전 건축에 대한 계획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그 비전에 대해 생각합니다. 제가 병원에서 하루에 4시간씩 투석을 할 때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하는데 저는 그것조차도 감사합니다. 저는 투석을 할 때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새로워질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합니다. 벌써 25년이 지났는데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점점 열정이 식어가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 열정을 다시 살릴까에 대해 생각합니다. 계속 생각하니까 그림이 그려집니다.
느헤미야를 보면 정말 용기 있고 빈틈없고 준비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된 사람은 기회가 닿을 때 횡설수설하지 않습니다. 왕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일목요연하게 비전을 설명합니다.
모든 것 하나님의 은혜
8절입니다. “‘그리고 왕의 산림 감독 아삽에게 친서를 내리셔서 성전 옆 성문과 성벽과 제가 살게 될 집의 들보 재목을 내주도록 해 주십시오.’ 왕은 내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내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내 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왕에게 말한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지혜롭고 분명하게 누구든지 설득할 수 있게 요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성전을 재건할 수 있는 공이 자기 자신에게 있거나 아닥사스다 왕에게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조금 잘나갈 때 하나님 앞에 공을 돌리지 않고 내가 모두 가지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저는 지난 25년 동안 온누리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가장 먼저 선교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복음 중심의 교회, 성령 중심의 교회, 선교 중심의 교회를 위해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지나치도록 선교합니다. 25년 동안 1,000명이 넘는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앞으로도 1,000명을 더 파송해야 합니다. 또한 저는 청년사역에 대한 비전이 있었습니다. 열두 가정으로 교회를 시작했을 때 “청년 2,000명만 주십시오. 그러면 세계를 주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보니 교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메뚜기떼 처럼 청년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 대학청년부에 모이는 숫자가 8,000명이 넘습니다. 누가 그 많은 청년들을 보냈을까요. 제 설교를 들으러 왔을까요? 아니면 교회 시설이 좋아서 왔을까요? 비전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목숨 바쳐 주님의 일을 하려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순교자가 많습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느낍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김사무엘 목사님을 늘 생각합니다. 그분은 일본에서 목회를 잘하시다가 북한 선교를 위해 서울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라크에서 전쟁이 터져서 이라크로 보내달라고 하셨습니다. 한창 전쟁 중일 때 김사무엘 목사님을 비롯한 청년들이 모두 유서까지 쓰고 그 땅에 들어갔습니다. 김 목사님은 전쟁 중에 교회와 선교센터를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허리가 아파서 검사를 해보니 백혈암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분이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수술을 받고 눈을 뜨니까 워싱턴이 보이는 게 아니고 바그다드가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비전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의 비전을 세상이 막지 못합니다.
믿음에 대한 확신 있어야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은혜의 손길이 내 위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8절).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미래가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현재처럼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현재 상황에 따라 계속 믿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누리교회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까?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여러분에게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비전을 주셨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내 머리 위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가난과 저주가 우리의 인생에서 물러갔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로 치유되었습니다. 우리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의 자아는 죽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런 믿음과 이런 고백이 있을 때 잠깐 파도가 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확신과 믿음이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제부터 느헤미야가 불가능의 벽을 넘어서서, 원수들의 모함을 넘어서자 기적같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를 통해서 이러한 믿음이 여러분의 마음에도 불같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저도 가끔 파도가 밀려옵니다. 얼마 전에도 혈압 수치가 80까지 내려갔습니다. 투석하던 중이었는데 도저히 투석을 받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아프다가 죽을 거야. 내가 준비한 일들이 다 없어질 거야.’ 이런 시험이 왜 제게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시험을 가지고 제가 25년 동안 온누리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하루도 이런 시련이 없을 때가 없었고 위기가 없을 때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원동력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내게 있었기 때문에 죽지 않고 여기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5년 전에 온누리교회를 시작할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환경이 너무나도 많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비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성전을 재건하는 비전을 가진 것처럼 우리의 비전은 변하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의 환경이 변했지만 우리의 비전은 더 강렬하게 빛을 낼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함께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온누리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