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아사히카와 러브소나타 문화전도집회
요즘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합니다. 왜 자살을 할까요? 입구는 있는데 출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살사이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이트에는 자살하는 방법이 자세히 기록돼 있으며, 또한 그 사이트에 접속한 사람들이 모여서 동반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유명한 연예인들도 자살합니다. 일본에 한류를 일으켰던 한 유명 연예인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심한 우울증, 죄책감, 수치감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목숨을 끊습니다. 자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입니다.
내 안에 숨어있는 원죄와 정욕
동전에 앞면과 뒷면이 있는 것처럼 자살 뒤에는 살인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자기의 내면에 감당할 수 없는 분노와 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프고 병이 들면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프고 상처를 받으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오늘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 싶은 중요한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으니 보십시오. 새것이 됐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옛날은 지나갔습니다. 절망과 상처도 모두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처럼 우리는 더러운 옷을 벗었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옛것’이란 타락한 사람, 저주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젊었을 때 저는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을 읽으며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미우라 아야코 소설의 대부분은 원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벌>, <까르마조프가의 형제들>도 모두 원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우리는 마음속 깊이 들어와 있는 원죄에 대해서는 건드리려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겉으로 짓는 죄가 아닌 내 안에 숨어있는 깊은 원죄입니다. 악순환되는 인간의 원죄의 꼬리를 어떻게 끊어버릴 수 있을까요.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한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책 속에서 목사는 한 여인을 간음하고 그 여인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고서는 괴로워합니다. 우리에게 감동과 눈물과 전율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원죄입니다.
인류 최초의 죄는 살인이었습니다. 최초로 살인을 저질렀던 가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과 동생 아벨과 비교를 당했다는 것 때문에 동생을 살인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후 죄는 계속해서 인류의 몸속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원죄를 ‘수치스러운 정욕’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정욕이 있습니다. 이 정욕 때문에 술집과 사창가가 생겨났고 남의 아내를 빼앗고 남의 남편을 빼앗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부부가 이혼을 합니다.
원죄의 핵심에는 정욕이 있습니다. 정욕에는 눈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죄를 짓습니다. 겉으로 짓는 죄보다 더 중요한 죄는 마음으로 짓는 죄입니다. 우리는 내면에 있는 타락하고 수치스러운 정욕을 죽여야 합니다. 내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숨어있는 원죄와 정욕을 죽여야 합니다. 그것을 죽이지 않으면 이것은 점점 자라나서 여러 가지 범죄를 저지르게 할 것입니다.
수치스러운 정욕을 죽이십시오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교만한 자아와 자존심, 수치감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납니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은 우리 안에 남아있는 수치스러운 정욕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도 이것 때문에 심판을 당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파면당한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사람은 모두 ‘죄’라는 무거운 돌덩이를 지고 있습니다. 숨이 막힐 정도로 큰 돌덩이가 우리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으로 통제되지 않는 죄악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로마서 1장 29~31절에 죄가 어떻게 발전하고 변하는지 나옵니다.
“그들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질투와 살인과 다툼과 사기와 악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중략).”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무거운 돌덩이입니까. 이제 로마서 마지막 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일을 행하는 자가 죽어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법규를 알면서도 그런 짓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합니다”(32절).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이대로 죽어야 할까요? 인생을 포기해야 할까요? 인간은 자기가 죄를 짓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속에는 숨어있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까만 옷에 잉크를 떨어뜨리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는 죄를 모릅니다. 죄에 오염된 인간은 정욕으로 가득 차 있고 결국 죽음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얀 옷감에 잉크를 뿌리면 금방 티가 납니다. 양심이 밝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들은 작은 죄라 할지라도 몸부림을 칩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무지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서도 무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 안에 있는 무거운 돌덩어리를 던져버리게 합니다.
예수님을 초청하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으니 보십시오. 새것이 됐습니다”(고후 5:17).
“새것이 되었다”는 말에서 세 가지 해답이 제시됩니다.
첫 번째는 ‘누구든지’ 입니다.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빈부귀천도 없습니다.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원죄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됩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의 조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으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 짓는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죄 없는 사람만이 죄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해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옛사람은 사라지고 새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이 자리에 계십니다. 그분은 육체가 아니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므로 지금 이곳에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여러분 안으로 들어가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2,000년 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새사람이 됩니다.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어떻게 내가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자신이 그렇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변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면 어둠은 사라지고 빛이 들어옵니다. 새사람이 되면 저주와 미움은 사라지고 우리 안에 사랑과 용서가 생깁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강제로 오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격과 의지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의지로 마음의 문을 열고 초청하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여러분, 불 꺼진 방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무리 칠흙 같은 어둠이라도 스위치를 올리면 방은 순식간에 환해집니다. 빛이 들어오면 진정한 자유와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과 생명으로 오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해보십시오. 어둠에 있지 말고 빛으로 나오십시오. 미움과 저주와 갈등 속에 살지 말고 평안과 기쁨으로 사십시오. 여러분들은 지금 이 자리에 초청을 받아 오셨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고 교회에 가지 않는 분들도 이 자리에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마음을 바꾸십시오. 그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출처: 온누리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