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것을 무너지게 하는 것

이지희 기자  jhlee@chtoday.co.kr   |  

김성득 목사

모든 강력해 보이는 것들도 그것만의 문제가 있기 나름입니다. 그리스의 고전 일리아드에 나오는 아킬레스라는 영웅이 있습니다. 이 영웅은 테티스라는 여신의 아들이었는데, 테티스는 이 아들을 불사신으로 만들기 위해 스틱스 강에 몸을 담급니다. 테티스가 아들의 발꿈치를 잡고 강물에 넣어 강물이 닿지 않은 발꿈치는 아킬레스의 유일한 약점이었는데, 결국 이 발꿈치에 파리스가 쏜 화살을 맞고 죽게 됩니다. 이것은 신화이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유럽은 두 개의 종파가 양분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반도를 기점으로 서유럽은 로마 가톨릭이, 그리스를 포함한 동유럽은 그리스 정교회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는 황제와 교회의 정치적 대립과 신학 논쟁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서유럽은 로마가 게르만 족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다양한 민족들이 다양한 나라를 이루어 1천년의 세월을 보냈던 반면, 동유럽은 흔히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리는 동로마 제국이 천백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서 있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삼중 성벽은 그때까지의 모든 침공을 다 물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잔틴 제국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것은 이슬람교 신자들인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중동지방을 휩쓸고 비잔틴 제국을 침공한 것입니다. 비잔틴 제국은 옛날의 영화는 사라지고 쇠약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서교회의 합동을 통한 서유럽의 원조를 얻기 위해 신학적인 양보까지도 각오하고 협력을 이룹니다. 서유럽 국가들, 특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여기에 협조를 합니다.

서유럽이 비잔틴을 원조하기 위한 함대를 건설하는 동안, 오스만 투르크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됩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키기 위해 본토의 그리스인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베네치아인들, 또 다른 도시국가 제노바의 용병들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방어를 하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는 병력은 7천명, 공격하는 오스만 투르크의 병력은 16만 명이었습니다. 중과부적이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천백년을 버텨온 삼중 성벽이 있었기 때문에 수적 우세만이 능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 군은 강력하기로 소문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삼중 성벽을 부수기 위한 대포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화약 무기가 세상에 사용되기는 했지만 오스만 투르크 군이 장비하고 있는 대포는 당대 최고의 기술을 적용한 대포였습니다. 그 사정거리와 쏘아 올릴 수 있는 포탄의 크기는 당대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강력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삼중성벽을 무너뜨린 것은 오스만 투르크 군의 대포가 아니었습니다. 그 성벽을 무너지게 하고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것은 바로 가장 용맹한 장수의 연약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탈리아어로 주스티니아니, 그리스어로 주스티니아스라는 제노바의 용병 대장이 있었습니다. 용병이란 돈을 벌기 위해 전쟁을 직업으로 삼는 전쟁 전문가 집단이었습니다. 원래 돈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돈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놀라운 전투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주스티니아스는 이 용병들을 이끄는 대장이었습니다. 50일이 넘는 공방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그 자신이 비잔틴 황제에게 최종 방어선을 외성곽으로 삼되 외성곽에서 내성곽으로 철수할 수 있는 문들을 다 걸어 잠그고 그 열쇠를 비잔틴 황제가 보관하게 함으로써 일종의 배수진을 치고 도시를 보호하자고 제안했던 사람입니다.

그 제안이 채택되어 모든 병력이 외성곽에 방어선을 치고 공격을 견디고 있었는데, 뜻밖에 그 용맹한 주스티니아스가 적의 화살을 맞게 됩니다. 주스티니아스의 용맹성은 그만 바닥을 드러냈고 그는 비잔틴 황제에게 내성곽을 열고 자신을 도시로 후송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비잔틴 황제는 그렇게 되면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거절하였지만, 주스티니아스는 황제에게 자신을 후방으로 보내줄 것을 계속 요청합니다.

결국 주스티니아스를 후송하기 위해 내성곽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을 때, 주스티니아스의 지휘 하에 있던 용병들이 자신들이 진 것으로 생각하고 이 문으로 집단 도주를 시도합니다. 이것을 본 그리스 군들이 제노바 용병들을 제지하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생긴 혼란을 오스만 투르크 군이 파고듭니다. 결국 이것으로 말미암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삼중 성벽은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점령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성 소피아 대성당은 이슬람의 모스크로 바뀌었다가 몰려드는 기독교 관광객을 위해 현재 모스크로는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강력하다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삼중 성벽은 대포가 아닌 한 인간 안에 있던 연약함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역사상 강한 제국들이 무엇 때문에 멸망했습니까? 국력을 소진하여 쇠약해졌다가 결국은 더 강한 외침에 의해 무너졌다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나라로 하여금 국력을 소진하게 했을까요? 어떤 나라는 임금의 지나친 사치와 향락 때문에, 어떤 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파견된 미녀에 의해, 어떤 나라는 지나친 영토 확장의 욕심으로 인한 정복전쟁 때문에 국력을 소비했고 결국은 망했습니다.

이런 국력 소진의 이유들 중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국론 분열과 당파 간의 분쟁이었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침략을 힘을 합쳐 막기보다는 자기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부리며 정적들을 제거하다가 결국은 얼마 남지 않은 국력마저 소진시키고 멸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강한 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강한 것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강한 것 안에 있는 연약함이 외부로부터 오는 물리적으로 강한 것에 반응하게 되면 강해 보이는 것도 무너지게 됩니다.

인간 내부에 있는 연약함은 대부분 인격적 결함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발언을 많이 하고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면 자신이 강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강변할 뿐입니다. 이 연약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 자신을 비추어서 자기의 부족과 무지와 무능을 인정해야 하며,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맡김으로 내 연약한 본성이 브레이크가 파열된 불도저나 기관차와 같이 폭주하는 것을 방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지도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영적 지도자의 신앙적 지도를 받으며 말씀과 기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는 안정되고 우리의 연약함이 교회를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강한 것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습니다. 왕성교회가 건강한 가운데 비전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내 연약함이 그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기도하며 말씀에 따라 생활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 지도자의 지도에 순종하여 늘 왕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왕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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