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성애의 역사
생명의 관점에서 본 동성애
호모(homo)란 용어는 그리스어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성애의 반대 개념이다. 이 용어가 동성연애자로 사용된 것은 19세기 말 헝가리 의사가 이전의 동성애를 종교적 또는 도덕적으로 모멸하는 용어인 sodomy를 대신하여 병리학적 인식으로 만들어진 용어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동성애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부터 동성애와 동성애자를 모멸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게이(gay)라는 용어는 동성애자들이 어두운 동성애자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밝은 이미지의 기쁨이란 의미에서 사용되기 시작됐다. 원래는 남녀 동성애자 모두를 지칭했으나, 지금은 주로 남성 동성애자를 가리킨다. 레즈비언(lesbian)은 여성 동성애자를 지칭한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여자 시인 사포가 그의 여자 제자들과 살았던 레스보스섬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커밍아웃(coming out of the closet, coming out stage)이란 용어는 ‘벽장 속에서 나오기, 혹은 무대로 나오기’의 축약으로, 동성애자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첫째, 동성애의 역사
고대 서양에서의 동성애는 플라톤의 향연에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에 나타나 있고(이정직, 2000), 구약성경의 창세기 19장 5절에 소돔성에 두 천사가 롯의 집에 찾아왔을 때 소돔 사람들이 집 주위를 둘러싸고 “너희 집에 온 그들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들과 상관하리라”고 협박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서 상관한다는 것은 영어 성경에 have sex with them(NIV)로, 동성애를 뜻한다. 로마 황제들 가운데 동성애자가 많았다는 사실 또한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최초의 동성애자는 신라 원성왕(785-798) 때 묘정이라는 미소년이다. 그리고 제36대 혜공왕(758-780)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평소 여자같이 행동하고 여자 옷 입기를 즐겨하여,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원래 왕은 여자였는데 남자의 몸을 벌어 왕이 되었으니, 나라에 불길하다고 하여 죽였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고려의 공민왕(1330-1374)이다. 왕은 몽고 공주 출신의 노국공주가 병사하자 큰 슬픔과 고통 속에 살다가 자제위라는 궁정 청년 근위대를 만들고 그들과 동성애를 즐기다가 후궁 익비와 사통한 홍륜에게 죽임을 당한다. 조선 실록의 세종기에 세자빈 봉씨가 후궁들과 오랫동안 동성애를 즐기다 발각되어 궁에서 쫓겨난 사건이 기록돼 있다. 구전으로 전해진 민간의 동성애 전통과 관련된 민담과 구전가요는 화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화랑의 남색 행위는 부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고려시대 경기체가 한림별곡에서 찾아볼 수 있고, 또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청나라 상인들과 미소년들이 거래를 통해 동성애 행위를 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단편적인 기록들이나 구전을 통해 우리 역사 속에서 동성애는 꽤 보편화된 것으로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동성애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동성애 인권운동에 참여하게 된 1960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그 전개과정을 보면 1890년경부터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를 동성애 운동의 발아기라 할 수 있다. 미국의 동성애 조직이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1924년이다. 독일계인 Henry Gerber에 의해 주도된 Society for Human Rights는 불과 몇 개월 만에 제 2회에 걸쳐서 Friendship and Freedom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미국 동성애사의 서장을 열었다(Adam, 1995).
1945-1969년은 형성기다. 이때는 제2차대전 직후로, 매카시즘이 파고들어 동성애자들이 탄압을 받고 있었던 때다. 그들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전용 술집을 만들어 자구책을 세워나갔다(Adam, 1995). 이러한 억압적 분위기 속에 킨제이는 1948년의 보고서에서 백인 남성의 50%만이 평생 이성애적 성행위를 원한다고 주장해 동성애 욕구가 얼마나 보편적인가를 사회에 부각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0-1950년대의 사회는 동성애 운동에 대해 배타적이었다(D'Emilio, 1983). 그러다가 1960년대 반전 운동과 미국 사회 전반에 일어난 급진주의는 동성애 운동의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1969-1980년대는 정착기로 볼 수 있다. 특히 1969년은 동성애 운동의 중요한 획을 긋는 해다. 1969년 6월 27일 뉴욕 경찰이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의 선술집 스톤 월 인(Stone Wall Inn)을 급습한 데 대해 동성애자들이 보여준 공격적인 저항과 조직적 집단행동 때문이다. 스톤 월 인 사태는 동성애자들을 하나의 정치적 세력으로 결집시켰다. 스톤 월 인 사태 1주년 기념 행사로 시작된 게이 행진은 연례행사가 돼 커밍아웃을 독려하는 축제로 정착됐다.
1981-1990년은 전환기로, 스톤 월 인 사태 이후 점차 입지를 넓혀가던 미국의 동성애 운동은 1980년대에 들어 에이즈라는 전혀 예상치 못하는 돌발 변수를 만나게 됐다. 1980년대에 많은 동성애, 게이들이 에이즈로 사망하고, 신보수주의적 사회 분위기로 동성애에 대한 억압이 강화됐다. 이런 환경 속에서 게이들은 에이즈와 동성애의 분리를 시도해 에이즈의 예방이나 치유를 위한 방안, 에이즈와 동성애는 별개라는 전략을 세우고 대응책을 강구했다(Vaid, 1995).
우리나라 동성애가 대학에 등장한 것은 1995년 10월로, 연세대에서 ‘성 정치’라는 용어로 등장했다. 2000년에는 탤런트 홍석천의 커밍아웃이 일반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이제는 동성애 동아리를 조직해 드러내놓고 활동하고 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주변에서 은밀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동성애를 다루는 웹 사이트는 약 50여개 이상인데, 그곳에 올라온 동성애 관련 질문은 총 1만개 이상이며 동성애를 다룬 서적과 전문 자료는 4,500권을 웃돈다. 또 이태원과 종로에는 동성애자들만의 공간이 1백여 곳 있다니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동성애에 대한 관심과 대상이 폭넓음을 짐작할 수 있다.
12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왕의 남자(2006)>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동성애 영화다. 해피투게더(1998), 필라델피아(1994), 패왕별희(1993), 토탈 이클립스(1995), 브로크백 마운틴(2006), 일본영화인 메종 드 히미코(2006), 프랑스 영화인 타임 투 러브(2005), 친구 사이(2009), 헤드윅(2000), 아이다호(1991), 후회하지 않아(2006)등이 있다. 이제는 영화를 벗어나 <인생은 아름다워(SBS)>와 같이 드라마로도 가정에 파고들고 있다. 어린이들이 그 드라마를 보고 영향을 받아 남자 아이들끼리 포옹하고 뽀뽀했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우남식 목사(CMI 대학마을교회·인하대 사회교육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