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유·불교와 기독교·천주교의 역사 비교
문제제기
한국 사회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 낸다. 다른 말로 하면 한국은 다종교사회이며, 다문화사회다.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조심스럽게 정책을 펼쳐 나가야 한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어느 특정 종교에 치우침 없이 다종교·다문화가 공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명문화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정부가 특정 종교를 편향해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정부는 전통문화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불교를 비롯한 전통 종교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상대적으로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곳이 바로 기독교다. 그리하여 기독교 일각에서는 기독교가 정부의 종교문화 정책에서 소외되고 있으며, 정부로부터 편향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런 현상의 원인을 살펴보고 그 현황을 분석해 대책을 마련하고자 한다.
논지를 전개함에 있어 우선적으로 전통 종교, 즉 불교와 유교를 중심으로 정부의 종교 정책을 다루고, 이런 정책이 어떤 법률·문화·정치적 배경에서 이뤄지는지 분석하며,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대응책을 설명하고자 한다.
본 논문에서 소위 천도교나 대종교를 비롯한 민족종교, 무속을 비롯한 민속신앙은 제외했다. 이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아울러 정부의 종교 정책도 주로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재청을 중심으로 다뤘다. 이들이 정부의 종교 정책을 다루면서 실질적이고 가장 구체적으로 관련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부서 외에도 교육부의 종교교육 문제, 국방부의 군종 문제, 행정안전부의 공직자 종교편향 문제 등 수많은 부처들이 직·간접으로 종교 정책이라는 주제와 관련돼 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이런 문제들을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Ⅰ. 정부 종교문화의 정책 배경과 역사
현재 정부의 종교 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 말기부터 우리나라의 종교정책을 간단하게 살펴야 한다. 조선 정부에서 유교는 국가의 종교였고, 유교 의례인 제사는 국가의 의무였다. 불교는 조선시대 내내 탄압의 대상이었지만, 조선 말에는 원흥사라는 불교 본부를 두면서 국가 관리체제 안으로 편입했다.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와 기독교는 여기서 제외됐다. 두 종교는 외부에서 들어오기도 했지만, 초기부터 이에 대한 보호·발전의 책임은 각 종교 선교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상은 일제 시대 때 더욱 구체화됐다.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천주교와 기독교는 조선총독부의 견제를 받게 됐다. 이에 비해 불교와 유교는 총독부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일본은 천주교와 기독교를 외래종교로 인식하고,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불교와 유교를 지원했던 것이다. 일제 시대 가장 박해를 받던 종교는 대종교를 비롯한 민족 종교였다.
불교는 총독부로부터 가장 큰 보호를 받았다. 조선 시대에 차별당했던 불교는, 사실 일본의 조선 침략과 더불어 발전했다. 그리고 일제 시대에는 완전히 국가의 통제와 지원 아래 있었다. 총독부는 불교의 인사와 재산을 관리했다. 일부 저항이 있었지만, 대부분 불교인들은 이런 지위에 만족했다. 유교도 마찬가지였다. 유교는 ‘망국의 종교’였고 조선의 멸망에 따라 지리멸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향교를 교육기관이라는 이름으로 지원했다. 총독부는 불교와 유교를 통해 기독교를 견제하려 했던 것이다.
해방 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종교는 일제 시대 견제받았던 천주교, 기독교, 그리고 박해받았던 민족 종교인 대종교였다. 미 군정 이후 등장한 이승만 정부는 서양 주요 국가들의 종교인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특히 여기에는 반공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이념 연대가 있었다. 반공을 강조했던 대한민국 정부는 반공의 보루인 기독교와 사상적으로 연대했다.
해방 후, 일본 치하에서 보호받던 전통 종교도 큰 변화를 맞았다. 불교는 오랜 논쟁 가운데 1962년 새로운 불교재산 관리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일제 시대부터 존속했던 사찰령을 개정한 것이다. 당시 한국 불교는 대처승과 비구승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있었고, 이런 과정에서 불교재산 관리법은 불교 내 문화재를 보호할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불교의 재산권이 침해당하기도 했다. 여기에 대한 불교의 반발은 극심했고, 이같은 반발을 반영해 이 법은 1987년 전통사찰보호법으로 개정됐다. 개정 법은 불교에 대한 불필요한 간섭을 배제하고, 전통사찰의 보존·관리에 강조점을 뒀다. 그리고 보존과 관리를 위한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다시 말하면 정부의 관리를 받는 대신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
해방 후 유교도 중대한 변화를 가졌다. 일제 시대 교육기관이었던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복귀시켜 종교기관으로 인정했고, 전국에 산재한 향교 운영권을 종교단체인 유림에게 넘겼다. 원래 성균관과 향교는 국가기관이었다. 그래서 일제 시대에도 총독부가 관리했던 것이다. 정부는 1962년 향교재산 관리에 관한 법을 제정해 향교재단법인을 만들어 향교를 운영하도록 했고, 향교 수입 중 10분의 1을 성균관에 납부해 성균관을 유지하도록 했다. 아울러 향교의 수입은 모두 유림 발전에 사용하고, 재산 처분은 감독관청의 허락을 받도록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불교와 유교는 원래 정부의 관리 아래 있었던 점이다. 불교는 정부가 도성 입금을 해제할 때부터 원흥사라는 절을 통해, 일제 시대에는 사찰령을 통해 관리를 받았다. 유교는 조선의 국교였으며, 일제 시대에도 총독부 관할 아래 있었다. 이런 점을 들어 불교와 유교는 일제에 의해 박해당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이들은 총독부 보호 아래 자신을 유지해 왔다. 이런 역사가 해방 이후에도 계속 남은 것이다. 불교는 전통사찰 보호법을 통해 통제와 지원을 같이 받으며, 유교도 크게 보면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비해서 천주교와 기독교는 종교 자체의 유지를 위하여 정부에 의존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선교사들의 재정에 의해 운영됐고, 후기에는 신자들의 헌금으로 운영했다. 유·불교가 국가 기관의 관리와 보호 아래 있었다면, 천주교와 기독교는 초기에는 선교사든 한국인이든 국가의 관리 밖에서 존재했다.<계속>